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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뫈 Nov 15. 2024

축구를 먹여 살리는 그 이름, 낭만

어쩌다 마주한 '축구 천재' 박주영의 고별전

축구를 먹여 살리는 힘은 뭘까. '축구 산업'을 돌아가게 하는 건 분명 티켓 파워, 굿즈 판매량, 스폰서십 등 마케팅적이고 금전적인 요소다. 하지만 축구 그 자체가 지속될 수 있도록 지탱하는, 아니 축구 그 자체를 받치고 있는 건 낭만이라고 생각한다.


축구에서 낭만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다. 사람마다 기억하는 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특정 선수의 플레이가, 응원하는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순간이, 경기에서 잠시 지나가는 장면까지 모두가 낭만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거대 자본이 스포츠 산업을 집어삼킨 지금도 분명 낭만은 존재한다.


예기치 않게 지난 주말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FC서울과 울산HD의 경기에서 오랜만에 이 낭만을 느꼈다. 한때 '축구 천재'로 불리며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최전방을 책임졌던 박주영 덕이었다.

난 서울 담당도, 울산 담당도 아니다. 두 구단을 담당하는 동료가 월드컵 예선 중동 출장을 준비하느라 내가 두 팀의 경기에 가게 된 날이었다.


당일 기자실에서 선발 명단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울산 관계자분이 오셔서 현재 울산에서 플레잉 코치로 활동하고 있는 박주영이 경기 명단에 포함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전반전 도중 출전할 예정이라는 내용도 귀띔했다. 사전 인터뷰 전까지는 엠바고를 걸었다.


울산 선수단이 베테랑들을 중심으로 뭉쳐 팀의 큰형 박주영이 서울 팬들에게 인사할 시간을 마련해주기로 한 것이었다. 울산의 김판곤 감독도 팀 분위기가 좋다는 방증이라며 웃었다. 서울의 김기동 감독은 박주영이 은퇴 타이밍을 잘 잡은 것 같다며 박수를 보냈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할 가능성이 높은 39세 박주영은 후배들의 배려 속에 전반 33분경 서울과 울산 팬들의 환대 속에 출전해 하프타임까지 짧은 시간을 뛰었다. 서울 구단은 전광판을 통해 감사의 메시지를 담아 박주영을 반겼다.


교체 출전하는 상대 팀 선수에게 홈 팬들이 환호를 보내고, 홈 팀이 전광판에 감사 인사를 띄워주는 모습은 보기 힘든 일이다. 심지어 서울은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를 위해 승점이 급한 상황에서 경기 당일 박주영의 출전 소식을 전해 들었음에도 구단의 레전드를 환영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교체 투입을 준비하는 박주영의 모습과 전광판에 올라온 박주영의 이름, 그리고 환호하는 팬들을 보며 가슴 한편이 찡해졌다. 지금까지도 내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양박쌍용'으로 묶이던 시절의 박주영, 박지성, 기성용, 이청용 중 두 번째 '박'의 마지막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박주영은 내가 팬으로서 축구를 한창 열심히 보던 2000년대 후반과 2010년대 초반까지 한국 최고의 공격수였다. 


지금도 회자되는 2010 남아공 월드컵 나이지리아전 프리킥 득점을, 2012 런던 올림픽 숙명의 한일전 '박시탈 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현 국가대표팀 선수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 아무리 골을 넣어도 당시 박주영의 득점을 봤을 때처럼 짜릿함은 느끼지 못한다. 흔히 말하는 추억 보정일 수도 있지만 정말 그렇다.


2005년 고려대에 재학 중이던 박주영은 서울에 입단하면서 프로에 데뷔해 2008년 AS모나코(프랑스)로 떠나기 전까지, 그리고 해외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2015년 이후 2021년까지 서울에서 총 314경기 90골 32도움을 기록했다. 모나코 이후 커리어가 꼬였다는 비판도 있지만 박주영이 남긴 임팩트는 분명히 대단했다.

한국 축구에 엄청난 공헌을 했고, 많은 일을 한 인물의 마지막이 다가온다는 게 아쉽다는 기성용의 말이 모두의 마음을 대변한다. 


박주영은 은퇴 관련 질문에 은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입에 올리지 않으면서 "내가 멈추면 그게 은퇴"라고 말했지만, 내년에 불혹의 나이가 되는 선수가 현역 생활을 이어갈 가능성은 크지 않다.


난 말 그대로 어쩌다 박주영의 고별전을 보게 된 거다. 물론 아직 울산의 홈에서 열릴 수원FC전이 남아 있지만, 지금의 박주영을 만들어줬던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박주영이 공을 차는 모습을 다시 보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

울산 선수들이 박주영이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서울 팬들에게 인사할 수 있도록 시간을 마련하는 것, 울산 코칭 스태프들과 구단도 흔쾌히 수락한 것, 여전히 경쟁 중인 서울이 구단 차원에서 박주영을 환영한 것 모두가 낭만이었다. 팬들을 축구장으로 모이게 하는 최고의 마케팅은 낭만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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