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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리나 May 02. 2023

잘 컸다는 것

"잘 컸네요"


모 기업 사회공헌 팀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나에게 주어진 일은 회사의 업의 특성과 전략 방향에 맞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준비한 프로그램은 중고등학교 청소년들을 위한 과학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여러 지역에 위치한 회사 사업장들 주위의 중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사업을 진행해야 해서 전국 단위로 사업을 운영해 줄 NGO를 선정했고, 해당 NGO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전담으로 운영할 전담 인력도 채용했다. (대부분의 대기업은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 NGO에게 운영을 맡기고 기부금 혜택도 받는다. 그리고 사업 운영을 맡은 NGO는 필요시 후원기업과의 논의를 통해 해당 사업만을 전담으로 진행할 전담 인력을 채용한다. 기업 사회공헌에 대한 이야기는 언젠가 다른 글에서 소개해 보겠다.)


그렇게 채용된 전담 인력에게 우리 회사를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 출장을 갔다. 지방에 위치한 회사 사업장을 견학도 하고 직원들 소개도 해 주기 위함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 사업장 입구 대기실에서 견학 프로그램 시작을 기다리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이 예전에 '바람개비 서포터즈'를 한 적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바람개비 서포터즈는 보육원 출신 선배들이 곧 보육원을 떠나야 하는 후배들에게 제공하는 멘토링 프로그램으로, 아동권리보장원에서 운영한다. 전에 아동자립지원단과 자립준비청년들을 위한 자립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한 적이 있어 바람개비 서포터즈에 대해 알고 있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어? 바람개비면 보육원 멘토링인데?"

"맞아요. 저 보육원 출신이에요"

"아..... 잘 컸네요."


아무 생각 없이 튀어나온 말이었다. 

보육원 출신이라는 생각지 못했던 대답에 대한 놀라움뿐 아니라, 실제로 지금 너무나 열심히 그리고 잘 일하고 있는 이 분에 대한 고마움도 담긴 말이었다. 이 말을 들은 그분도 '그렇죠 뭐'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때마침 견학 프로그램이 시작되면서 우리의 대화는 흐지부지 끝났다.


하지만 왠지 뒷맛이 씁쓸했다. 

일정을 마치고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서 숙소에 돌아오니 더욱 그랬다.


생각할수록 나의 실언이었다. 

보통 잘 컸다는 말을 누구한테 할까? 예전에는 제 몫 할 것 같지 않던 아이였는데 생각 외로 잘 해내고 있을 때 하는 말 아닌가. 나는 보육원 출신이기 때문에 제 몫을 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기 힘들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일도 아니고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심지어 자립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해 본 적도 있으면서 이런 편견에 가득했다는 게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잘 컸는지 아닌지 모르는 입장에서 상대방이 어떤 가정환경에서 자랐든 잘 컸다는 둥 쉽게 결과론적인 판단을 내리고 또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냈다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난 결국 그분께 뒤늦은 사과를 했다.

그분뿐 아니라 모든 자립준비청년들에게 미안한 말이었다.

 


칭찬을 가장한 칼날


누군가가 당신에게 '잘 컸네요'라고 하면 기분이 어떨까. 

아마도 일반 가정에서 별다른 일 없이 자란 사람은 잘 컸다는 말을 들은 적도 별로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분은 잘 컸다는 말을 여기저기서 꽤 많이 듣는다 한다. 심지어 칭찬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결국 이건 수많은 사람들 마음속에 결국 작든 크든 보이지 않는 편견이 가득 차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편견들은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잘 컸네요'라는 말처럼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서 듣는 이들에게 많은 잔생채기들을 만들어낸다.

나의 실언과 또 사과 후에 그 분과는 진실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나 스스로 자립준비청년들에 대해 다시 한번 하는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립준비청년들은 보육원 같은 아동양육시설이나 가정위탁 등에서 보호를 받다가 만 18세 이후에 보호 기간이 종료되면서 세상에 나와야 하는 청소년들을 말한다. 누가 봐도 어린 나이에 세상에 홀로 서야 하는 청년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생기면서, 언론에도 많이 소개되었고 국가나 기업의 지원도 전보다는 확실히 확대되었다. 자립지원전담요원이나 자립지원전문기관도 생겼고, 잘 활용만 한다면 정말 도움이 될 만한 제도들도 많다. 하지만 (어느 업계나 그렇겠지만) 직접 현장에서 보고 들으면서 느끼는 한계점도 많고, 더 고민해야 하는 이슈들도 많다.


지금 그분은 사회복지사 자격을 취득하고 자립준비청년 지원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앞으로 그분과 함께 자립준비청년들에 대한 세상의 편견과 시선, 그리고 직접 겪으며 느낄 수 있는 많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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