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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리나 Jun 20. 2023

조금은 독특했던, 나의 유년시절(1)

어느 자립준비청년의 이야기


(어느 자립준비청년이 직접 쓴 글을 일부 각색하여 싣습니다.)




누구에게나 유년시절 가슴 아픈 상처와 떠올리기 싫은 기억 하나쯤은 있을 거다. 나도 그렇다.

어머니의 외도와 아버지의 사업실패, 이혼, 보육원에서의 생활, 그리고 자립. 

또래 여느 친구들보다 조금은 더 독특하다면 독특하려나. 


얼마 전 환갑을 맞으신 아버지를 뵈러 갔던 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네가 7살 때 한 말 기억하니? 아빠 힘들면 동생 데리고 보육원에 들어가겠다고 했던 거. 아빠는 그 말이 너무 마음이 아팠어."

 

어렸을 때부터 나는 작은 어른이어야만 했다. 

아버지는 잘 나가던 사업을 운영하셨다가 사기를 당해 해외로 수년간 일을 하러가셨다. 나와 동생은 어머니와 한국에 남겨졌다. 아버지와 12살 차이였던 어린 어머니는 육아에 매우 서툴렀고, 이따금씩 손찌검으로 나와 동생을 다스리곤 했다. 어머니는 늦은 밤이면 지하방 입구에 숨겨둔 검정 비닐봉지 속 옷을 입고 나이트에 갔다. 자고 일어나면 아무도 없어서 동생과 껴안고 엉엉 울었다. 그때부터 동생은 내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슬하의 9남 2녀 중 우리 아버지를 유독 예뻐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친척들의 질투를 내가 다 받아내야 했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친척들은 늘 나에게 달갑지 않았던 것 같다. 차가운 미소로 곁을 내주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 어린 시절에도 이런 친척들의 태도와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먹었던 눈칫밥이 그렇게 서러웠다. 난 잘못한 게 없는데.


그리고 그렇게 난 동생과 함께 보육원에 들어갔다. 


중학교 때는 제법 공부도 했다. 보육원에서 지내다보니 공부를 잘 하지 못하는 형들 사이에서는 늘 엘리트였다. 보육원에서는 학업에 대한 기준이 낮다보니 늘 작은 노력으로도 보육원에서 요구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성취해냈다. 나는 다른 보육원 친구들에 비해 입소 당시의 나이가 많다보니 대부분의 가치관이 형성되어 있었고,  ‘옳고 그름을 말할 줄 알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실행해야 한다는 생각에 선생님이나 형들에게도 입바른 소리를 많이 했다. 그래서인지 미움받는 일도 많았다. 다니고 싶었던 학원이 있어도, 아부를 잘하거나 예쁜 친구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졌고 후원금이나 다른 지원도 알게 모르게 나에게까지는 잘 오지 않았다.


사실 청소년기의 나는 어머니가 너무 그리웠다. 나를 버렸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함께 살 수 없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잘 사는지 너무 궁금했던 나는 어머니를 찾아갔다. 차라리 덜 똑똑했다면 만나지 않을 수 있었을텐데, 이럴 때는 왜 또 그렇게 지역사회의 자원을 잘 이용할 줄 아는지, 동사무소를 찾아 힘들이지 않고 어머니를 찾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그 자식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어머니의 집 문 앞에서 어머니와 마주했을 때 그 눈빛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 나를 보는 순간 어머니의 눈빛은 무언가를 훔치다 걸린 도둑처럼 불안했다. 그렇게 궁금했고 그리웠는데, 그 때 만난 어머니는 남이었다. 다신 찾아오지 말라며 모진 말을 하며 나를 밀어냈다. 나도 화가 났고, 점점 언성이 높아지니 그 남자가 저 멀리서 뛰어왔다. 손에는 장미문양이 그려진 부엌칼이 쥐어져 있었다. 나는 도망쳤다. 도망치면서도 도망치는 내가 싫었다. 떳떳한데 도망가는 것이 싫었는데 내 발은 아니었나보다. 아주 날쌔게 도망갔다. 그게 내가 어머니를 찾은 마지막이었다.


- 2부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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