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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성 Oct 30. 2024

혼나볼래요? 그러면 할래요?

[발등에 불똥 떨어져야 움직이는 나]

지난주 수요일인가 목요일인가.

퇴근을 준비하는데 상사의 호출이 걸렸다.


상사가 전화로 부르는 목소리는 다급했다. "바로 내 사무실로 와!" 나는 속으로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 싶었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OO내용으로 기획안 하나 올려야 하는데...” 상사가 부탁하듯 말했다. 일단 루틴적으로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사실 무슨 기획안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뭘 쓰긴 해야 하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말은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오늘이다.


오늘 갑자기 상사가 묻는다. “그 기획안 어디까지 됐어?”


"어... 아직... 그게 언제까지라고 말씀이 없으셔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러다 스멀스멀 기억이 났다. 그때 "알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사실 시작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차라리 당시에 "기한은 언제까지인가요?"라고 물었어야 했는데 그냥 지나쳐버린 것.


그렇다고 아예 잊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늘 생각에 머물러 있었지만 막상 착수하려니 귀찮음 그리고 방향의 모호함이 계속 발목을 잡았었다.


"아... 언제까지라고 하신 적이 없으셔서..." 또 핑계를 댔다.


상사도 다급해 보였다.


그보다 더 높은 상사가 그 기획안을 지금, 당장 원한다고 했다. 이제 나는 완벽하게 ‘나쁜놈’이었다. 두통이 왔다. 기획안... 기획안... 당장 써야 한다. 주말에는 중요한 일정이 있었고, 금요일에는 연차를 썼다. 머릿속에서 "못하겠다고 할까?" 하는 충동이 슬그머니 떠올랐지만 잘 참아냈다.


"다음 주 화요일까지 1차 초안을 만들겠습니다."라는 말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상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안돼. 지금 당장 가져와!!"


(지금 당장? 나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야속함이 가슴을 뚫고 나올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이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정시 퇴근은 물 건너갔다.


<계획 없던 야근 시작>

이제 야근 시작이다.

추가 수당도 없는 그러나 내가 안 했으니 억울해할 수도 없는 상황.

집에 갈 시간은 멀어 보였다.


컴퓨터를 다시 켜고 제목만 써뒀던 기획안 파일을 열었다.


(기획안... 대체 뭘 해야 하지?) 일단 기계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런데 웬걸? 방향을 잡으니 3시간 만에 기획안 초안이 완성됐다. 그동안 미루던 일들이 갑자기 한순간에 풀린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내가 그동안 뭐 때문에 이렇게 두려워하고 미뤘던 걸까?


문득 내 인생의 여러 숙제들이 동시에 떠올랐다. 수면 아래로 밀어둔 문제들. 시도조차 안 한 계획들. 어쩌면 그것들도 이렇게 시작만 하면 금방 해결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절반만 풀어내도 삶이 충분히 가벼워질지도 모른다.


늦은 퇴근길에 평소보다 생각이 많아졌다.


집에 도착하니 아내가 분리수거와 아이 씻기는 것까지 모두 해놨다.

나를 기다리다가 잠들었을 아이를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 옆에 잠시 앉아 귀여운 얼굴을 들여다보며...

"오늘 놀아주지 못해서 미안. 내일은 칼퇴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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