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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성 Sep 15. 2021

웰메이드, 막메이드

자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때 - 그대의 모습, 그대로 '가'

우리의 어떤 잠재적 기능이 지금의 성향을 가진 한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삶에서 자신을 특정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처럼 느껴진다. 타인의 모습은 잠깐 스쳐도 그 이미지를 간주해 어떤 성향의 사람일지 어렵지 않게 그려낼 수 있다. 일상화된 험담의 힘일까. 삶을 살아가면서 어제 내가 뱉은 말이 오늘의 내가 되는 경험을 종종 한다. 두 사람이 대화를 통해 서로의 세계를 공유하기 시작하면 낯선 틈에 다리가 놓아져 동질화되어간다. 내 안의 감각을 깨우는 말들은 분명 어느 가을밤 신촌의 골목에서 우리의 대화중에 뿌리를 내렸다.



말은 한참을 돌아 내가 된다. 어느 날 문득 방전된 나를 만났다. 멀리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 나는 별 탈 없이 사회생활을 하는 평범한 사람으로 보였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내면의 끊임없는 갈등이 피어난다. 때로 을의 횡포를 보여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다. 오랫동안 그려온 어떤 삶에 대한 집착을 놓을 수가 없다. 꿈과 현실은 다르다는 말을 받아들이는 중일까. 말수가 줄어들면서 나다움을 잃어가는 것 같다. 아침해가 뜰 때까지 떠들어도 시간이 부족하던 우리의 그 시절이 그립다. 조금 더 머물렀다면 우리 방황의 시간이 이처럼 길지 않았을지도.


본연의 자기 모습은 감추고 잘 편집된 타인의 삶을 쫓는 게 즐거움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대중의 눈을 사로잡는 레시피는 거의 공개되었다. 전문가들에 의해 철저하게 고안된 상품은 일반적인 홈메이드보다 여러모로 대중 호환성이 좋다. 공산품의 힘은 고품질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것. 평범한 개인이 꽤나 노력해도 전문 설비에서 탄생한 공산품의 퀄리티를 능가하는 것은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글, 영상, 음성 등 개인의 창작이 다시금 주목받는 지금이 너무 소중하다. 언제 이곳에도 컨베이어 벨트가 놓일지 모른다.



사용감이 묻어난 스프링노트 앞쪽 몇 페이지를 찢어내면 새것을 사용하는 기분이 든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마치 대단한 모험을 준비하는 자세로 노트에 어떤 계획과 다짐을 가득 써 내려간다. 찢고 다시. 존속과 자기 생존을 위해 우리에게 후천적으로 개발된 능력이 도전과 변화로 위장한 자기반성이 아닐까? 타인의 시선과 말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표현이 자연스럽지 않다. 곧 자유를 빼앗긴다.


괜히 도박하지 말고 여기에 오래도록 붙어있어 / 밖에 나가서 뭐해먹고 살거야 / 다니면서 천천히 준비해 / 막상 나가보면 여기보다 괜찮은 곳 없어 / 가정도 있고 나이도 찼는데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지 / 가스라이팅


팬데믹 후 자본과 노동의 가치가 전도되면 안정적인 직장은 큰 자산이 된다. 반대로 빚으로 빚은 자산의 출구를 미리 준비하지 못하면 위험에 처한다. 세상이 급변할 듯 우리를 조바심 나게 하지만 아마 그런 떠들썩한 소식은 과거에도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도전과 변화보다 현재에 안주하라는 주변으로부터 잠시 벗어나자. 공산품은 대중으로부터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온갖 비겁한 술수를 동원한다. 공산품이 가장 노력하는 것은 대중이 자신의 이야기가 가장 상품성 있다는 사실을 모르도록 시선을 돌리는 일이다.


- 찢어버린 스프링노트 앞쪽 몇 페이지 X 100, 이 타임루프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대여 그대로 '가'

/ `21.09.15(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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