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이었던 인생 경험치가 모여서 '선'이 되는 순간. 미쓰노의 창업일기
'점'이었던 인생 경험치가 모여서 '선'이 되는 순간.
집이 대단히 유복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또 할 거 못할 거 따지며 마음 전전긍긍할 만큼 어려움을 겪으며 자라지 않았다. 젊어서도, 나이들어서도, 내 자식 만큼은 고생없이 키우고 싶다며 쉼 없이 일하던 여느집 부모님과 같은 희생 덕분이었다.
다만 내 울타리에는 한 가지 조건이 늘 붙어 있었다.
'지원은 고등학교까지만. 대학부터는 알아서'
그래서 난생 처음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해가 바뀜과 동시에 아르바이트라는 걸 하기 위해 껄떡거렸다. 처음에는 친구들과 함께 체력만 있으면 하루에 만원에서 만 이천원 정도 벌 수 있다는 전단지 아르바이트나 미용실 스텝 아르바이트를 찾아보았다. 이제 갓 고등학생 딱지를 뗀 앳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없었다. 그러다 느닷없이 대형마트 시식코너 아르바이트를 추천받게 됐다.
어설프게 고생하며 만원, 이만원 버는 아르바이트 보다 응대만 잘 하고 싹싹하면 하루 일당이 더 쎄다는 판촉 아르바이트였다. 노랗고 빨갛고 한 앞치마와 머리수건, 투명 마스크를 채 만두를 굽거나 초코볼을 담고 있는 우리와 달리 굽 높은 하얀 운동화와 무릎까지 올라오는 하얀 토시, 짦은 검정색 스커트를 입고 판촉하는 언니들의 모습이 대단히 예쁘고 멋있어 보이기만 하던 시절이었다.
대형마트 내에 있는 직원 휴게실에 앉아 있을 때면 어른들은 '아이고~ 스무살? 그래도 학교다닐 때가 편했지? 사회 나오면 다 고생이야. 고생.', '여긴 맥아리 없어보이면 다 물어 뜯으니까 조심해. 야생이야. 여기저기 말을 많이 하고 다니지마' 라며 조언을 주시곤했다.
발발발 하는 성격이다 보니 판촉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주변 이모님들은 '네 일당이 5만원인데 밥 값은 하고 가야지'하며 지도해주셨고, 영세한 업체 담당자님은 '저희 진열 죽지 않도록 진짜 꼭꼭 노력 좀 부탁드려요'하며 매번 주눅든 어깨를 보이시곤 했다. 평소엔 아무생각 없이 보던 마트 진열장이었는데 저 맨 아래 바닥부터 중앙, 손이 안 닿는 상단까지 이 케이스는 철저하게 홍보비용과 매출 등에 따라 매달, 매주 조정이 되고 있었다. 너무 유명해서 설명 하나 없이도 매출이 나오던 판촉은 쉬웠고, 새로 나온 신제품이거나 생소한 브랜드인 경우 사람들이 눈길을 주지 않거나 맛만 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아 어렵기도 했다.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내 일당은 하루 8만원으로 올라 있었다
'맨날 맛만 보고 가는데 오늘은 하나 팔아줘야지', '먹었으면 사는 거야. 안 살 거면 맛보지 말아야해.' 하며 농담처럼 응원해주시는 어른들이 있어 밥값은 하고 돌아가던 20대 초반. 야생에 처음 발딛은 우리가 안도감이라는 게 무엇인지 배울 수 있게 해준 점이이었다.
대학 입학 후에도 학기 중에 아르바이트를 하기 보단 방학이 끝나갈 무렵 한 3-4주 반짝, 아르바이트를 하고 한 학기 용돈을 벌곤 했다. 베이커리나 식당 홀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구들이 방학 3개월 내내 일을 하던 것과 달리 시간은 상대적으로 여유로웠고 벌이도 조금 더 편했다. '판촉 아르바이트 소개해줄까?' 물으면 친구들은 '모르는 사람한테 말거는 거 보다 햄버거만 보는 게 낫겠어', '아침마다 빵 가격 외우는 게 낫지. 지나가는 사람한테 사라고 절대 못하겠어' 하며 손사레를 쳤다. 사람에게 다가가는 게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아 할 수 있는 일이었구나 싶다.
명절에는 명절 앞뒤 연휴를 포함해 10 여일 정도 판촉이 이루어졌는데, 선물세트다 보니 무게나 경쟁의 정도가 남달라도 주머니에 들어오는 건 배로 많았다. 아르바이트생인데도 불구하고 '이번 매출, 너무 잘 빼줘서 고맙다'고 인센티브까지 챙겨주던 주류업체를 보며 어쩌면 사회는 마냥 야생이기만 한 건 아닌가보다 하는 생각을 했던 때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나는 토끼였고 느닷없이 호랑이를 잡아버린 그런 경우라 특별히 더 챙겨주셨던 거 같다.
취업 후에도 타이밍이 맞을 때면 한번씩 토일, 주말 단기 판촉 아르바이트를 하느냐고 일주일을 일로 보내곤 했다. 그러다 매너리즘이 찾아왔다. 일상은 매일 똑같고 변화는 없었다. 의견은 피력되지 않았고 열정에는 매번 찬물이 끼얹어졌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다 결국 내가 제시했던 의견대로 돌아가는 상황에 피로감이 쌓여갔고 늦어진 일정을 맞추느냐고 체력을 갈아넣었다. 버스에 난 작은 창문에서 들어오는 밤바람을 맡으며 '이 열정을 내 사업에 쏟아야할텐데'하는 생각을 떠올리곤 했다. 이미 내 사업장을 차렸다가 '여자가 무슨 사업이야, 취업이나 해서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야지' 하는 반대에 부딫혀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직장생활을 한지 3년차에 접어들 쯤이었다.
누구나 찾아오는 직장생활 3년차의 병. 어떻게 하면 일상에 변화를 줄 수 있을까 싶어 퇴근 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다. 이미 다양한 취미생활을 겪어 봤던 상황에서 다른 취미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퇴근 후 작은 치킨집에서 홀알바를 하고 있다는 친구 이야기에 아르바이트 어플을 깔아 일자리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 가운데 월화, 이틀만 일할 수 있는 곳. 그 정도면 업무피로감 보단 변화가 주는 에너지가 더 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사회는 야생이었다.
곧 찾아올 장마철에 대한 아무생각 없이, 주막이라고 불리는 막걸리가게에서 장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사람. 돌이켜보면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싶지만 그래서 이런 점이 지금의 선을 만들었구나 싶기도 하다.
막걸리가게는 21개 정도 되는 테이블이 있는 가게였다. 평소 사장님이 잡다하게 물건을 쌓아놓느냐고 쓰지 못하는 테이블 4개를 제외하고도 21개의 테이블이 운영되는 가게였다. 단순히 타이쿤이라고 생각했고, 사람들이 월요일, 화요일부터 술을 뭐 얼마나 먹으러올려나 하는 생각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참 많은 사람들이 요일에 상관없이, 시간에 상관없이 음주를 즐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사장 1명, 아르바이트생 1명. 그마저도 사장님은 불쓰는 안주 요리하는 것만 내가, 나머지 불 안쓰는 안주는 네가. 홀서빙도 네가, 설거지도 네가, 주방정리도 네가- 라는 역할을 부여했다. 하지만 점점 가게 문을 여닫는 것도 내 일, 요리를 만드는 것도 내 일이 되고 있었다. 시급은 여느 가게나 마찬가지로 동일했다. 근무시간은 저녁 8시부터 새벽 2시였지만 사장님은 퇴근하고 온 직후부터 바로 근무를 시작해 손님이 있으면 새벽 4시까지 근무를 부탁하곤 했다. 매일 20~30분씩 더 일하는 시간은 아르바이트 비용에 산출되지 못했다.
처음에는 내가 지금 가게운영 타이쿤 게임을 하는 건가 싶었다. 사장이 제 역할을 소화하지 못하더라도, 건물 윗층 만화방에서 놀다가 '손님이 안주시키면 전화해' 하고 사라져도, '내가 사장의 몫까지 소화해내면 되지 뭐' 하는 생각으로 봄에 시작해 장마기간을 지나 가을이 끝나갈 때까지 8개월 가량 주막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다 유통기한 지난 막걸리를 과일과 함께 갈아 손님상에 내면 된다는 사장과 또다시 트러블이 생겼다. 생막걸리를 취급하는 집에서 선입선출도 안되고 유통기한 관리도 안돼 3일 지난 막걸리가 나온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지 않던 나이 먹은 직장인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처음 붉어진 문제도 아니었다. 제 성질대로 다루기 어려운 쫄병이란 생각이 들었는지 며칠 지나지 않아 사장님은 문자로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으휴, 멍청한 놈. 나만큼 일해주는 알바생이 어디있냐. 지 복을 지가 차네"
그런 마음으로 지난 주말까지 일한 알바비를 정산해 이달 말까지 입금하라고 했다. 월화뿐 아니라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주말에도, 평일에도 손이 부족하면 연락이 오면 아르바이트를 나가 가게 일을 도와주던 중이었다. 자금 사정이 어려워 알바비 지급이 제 때 어렵다고, 한 달만 더 시간을 달라던 사장님에게 가차없이 제 날짜에 입금을 하라 답했다. 당일까지도 입금을 하니 못하니 실랑이를 하고, 돈이 덜 들어왔다며 근무일과 시간을 다시 정리해 보내는 등 난리통 끝에 다 받을 수 있던 내 임금이었다.
'저런 사장은 되지 말아야지', '저렇게 장사하진 말아야지', '내가 사장이었으면 더 잘할 거 같은데' 하는 사례란 사례는 이 당시 다 보고 배울 수 있던 거 같다. 이후 주막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임대 현수막이 걸렸다. 한참동안 새 주인을 만나지 못해 방치된 채 있는 모습을 보며 친구들과 거리를 지날 때마다 한 마디씩 덕담을 남겼다.
"부디 다른 데 가선 그러지 말길"
"알바 애들 어리고 모른다고 등쳐먹지 않길"
"뭘 그렇게들 좋게 말해. 그냥 병신이지. 저런 인간은 장사를 하지 말아야해"
유통기한이 지나도 냉동과일과 갈아서 다른 데 담으면, 그렇게 손님 상으로 나가면 '모른다', '괜찮다' 하는 마인드. 그런 사람이 과연 그거 하나만 속여가며 장사할까? 아니. 절대. 어딜가서 무얼 하든 똑같을 거다. 남 속여서 하는 일은 반드시 다 돌아온다. 지금도 한 번씩 생각해보면 내가 그 시절 그 시간, 왜 거기서 그 고생을 사서했나 싶을 때가 있지만 그 덕분에 남다른 화력으로 조리하는 주방일이나 결제를 위해 이 기계, 저 기계를 누르는 포스일, 테이블을 가득 채운 백 여명의 단체 손님도 혼자 받던 경험치가 쌓였으니까.
'그래, 그거면 됐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나의 점은 하나둘 찍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