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nt kim Feb 03. 2024

좋은 곳에 가라, 꼭 좋은 곳에 가라.

무교이지만 ‘믿음’. 나의 신은 어떤 형태로라도 존재할 것이다.

작년 중반기에 운전을 시작했다. 그전에는 운전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운전면허조차 따지 않았다. 사무실과 집은 1시간 정도 걸어 다니면 되고! 한 번씩 멀리 가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부모님이 태워주시거나 택시를 탔다. 시외에 가야 할 때는 시외버스나 고속버스가 오히려 더 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운전을 배울 필요가 전혀 없었다. 특히, 차를 사면 돈이 엄청나게 들고 영원히 돈을 모을 수 없다는 아빠의 가스라이팅을 제대로 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차피 차를 사지 못할 테고, 나의 면허는  곧바로 장롱면허가 될 것이 뻔한데! 그렇다면  굳이, 지금 운전면허를 따야 하나?


부모님과 떨어져서 살기로 마음먹은 뒤, 즉 독립을 하고 나서는 운전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급하게 면허를 따고 운전을 하게 되었다. 운전을 하고 나니까 어릴 때부터 기대했었던 어른의 모습에 가까워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은 게, 제일 좋다. 운전실력은 타고난다더니 나름대로 잘하는 편이다. 잘하는 일이 또 하나 생겼다는 점에서도 아주 만족한다. 실질적으로 나아진 점은 겨울에는 춥지 않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이동할 수 있기에 육체적 피로감이 덜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 어디든 움직일 수 있기에 이동의 제약이 사라졌고 그로 인해 할 수 있는 일도 더 많아졌다. 그동안은 남들이 하는 일을 굳이 나도 해야 하나?라는 억지 자존감을 만들어내며 나만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남들이 빠짐없이 하는 일을 굳이! 굳이! 포기할 필요는 없었다. 아빠의 말대로 앉아만 있어도 돈이 나가기는 하지만, 앉아있지 않고 조금 더 움직여서 해결하면 된다. 운전을 시작한 건 2023년에 했던, 유일하게 잘한 일이다.






운전자가 된 후에 생긴 ‘딱 한 가지의 단점’은 가장 앞자리에서! 제일 먼저! 도로에 널브러져 있는 물체들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로에는 온기를 잃고 흩어진 생명들이 너무 많았다. 내가 본다고 해서 그 생명들이 다시 부활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부디 차갑게 식은 생명체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앞서 도로에 놓인 물체를 주시하게 된다. 그게 무엇인지 꼭 확인해야 찝찝하지 않다. 직접 확인하지 못할 상황에서는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물어봐야 한다. “저게 뭐야?”.  도로 한복판에 떨어져 있는 것이 장갑이나 봉지 같은 무생명체라는 것을 알게 되면 토하듯,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운전을 하기 전에는 뒷좌석에 앉아서 멀리 있는 산을 보거나 하늘을 보았기 때문에, 더 멀리 나갈 때는 잠을 자면 되었기 때문에 도로에 널브러져 죽은 생명들이 이렇게도 많은지 미처 알지 못했다. 어떤 생명의 마지막을 적나라하게 마주하게 되는 일은 너무나도 안타깝고, 가엽고 힘들다.






이 강박적인 관찰의 시작은 비 오는 날 왕복 8차선 도로 중앙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아기 고양이를 발견했을 때부터였다. 이 날도 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비 오는 길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심한 소음들을 뚫고 “에-”하는 아기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귀에 박혔다.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니 이제 갓 눈을 떴을 듯한 아기 고양이가 도로 중앙에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마침 차가 오지 않아서 아기 고양이를 구출하려 했지만 한 순간 화물차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기 고양이가 잠시만 그 좁은 중앙선에서 버텨주기를. 그 공간에서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다음 신호에 이 고양이를 구출할 수 있었다. 화물차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아기 고양이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화물차 쪽으로 빨려 들어가 공중으로 흩어져버렸다. 1초 전에는 살아 움직였는데. 죽음이라는 것은 사람인지, 고양이인지, 강아지인지, 얼마간 살아갔는지 가리지 않는다. 죽는다는 것이 어려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쉬웠다. 손바닥보다 작아 보였던 아기 고양이는 나의 껌딱지 고양이 심바를 꼭 닮았었다. 몇 날 며칠을 그 아기 고양이 생각만 났다. 얼마 머물지 못했던 이곳에서의 생보다 더 좋은 곳에 닿아 안식하기를 바라고 바랐다.



어디가 되었든, 좋은 곳으로. 편한 곳으로.



이후부터는 무서워하는 ‘새’가 죽어 있더라도 ‘좋은 곳으로 가라.’라는 기도는 빼놓지 않게 되었다.  나라도 좋은 곳으로 가라고 충분히 빌어주고 싶었다.

운전을 하면서도 뻣뻣하게 굳은, 혹은 바닥과 한 몸이 된 사체들을 스쳐 지나갈 때, 나도 모르게 “좋은 곳에 가라, 꼭 좋은 곳에 가라.”라는 기도를 내뱉는다. 무교이지만 무신론자는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해주지 않으면 저 생명들이 좋은 곳에 가지 못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아주 작게라도, 진심을 다해 좋은 곳에 가기를 바라며 빌어 본다.





 나의 2023년을 망쳐버린 인간과 그 인간의 부하, 그리고 동생과 함께 고행의 출장을 떠난 날, 장거리 출장이라 고속도로를 달리고 달렸다. 그리고 어느 분기점에서 잠자듯 곱게 죽은 고양이를 보았다. 동생은 눈을 질끈 감으며 안타까워했으며 나는 좋은 곳으로 가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그 저주받을 놈은 콧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고양이가 죽었다고 이야기를 하는 순간에 콧노래를 불렀다. 그동안에도 숱하게 ‘인간끼리 느끼는 유대감’을 이야기하며, “꺼져.”라고 말하며 그다지 관심 없어 보였던 3살짜리 아이들이 주는 행복을 말했다. 나의 소중한 고양이들이 주는 행복을 무시하는 무례한 말들도 망설이지 않고 꺼내었다. 생명의 우위성을 논하는 딱 그 정도의 인간. 그렇기에 더 확신할 수 있다. 도로 위의 고양이를 보았다고. ‘이 따위 인간은 도대체 왜! 같은 세상에서 이렇게도 가깝게 살고 있는 걸까. 생명과 죽음이라는 것의 무게감을 깨우치지 못하는 무식함이 문제인가? 아니면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믿는 ‘우리’라는 인간 가치를 무시해서 하는 행동인가?’ 콧노래가 나오는 그놈의 코를 처박아버리고 싶었다.






이 이후에는 저따위 소음에 묻혀, 내 기도말을 신이 놓치게 될까 봐 3번 이상 말하고 있다. 꼭 좋은 곳에 가라. 어떤 곳이든 네가 좋아하는 곳으로. 숫자 ‘3’이 나의 엔젤넘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니 한 번은 놓치고 두 번은 놓쳐도 세 번째에는 이 말이 꼭 닿을 것이다.



많은 한국의 가정들이 그렇듯, 우리 할머니는 불교를 믿는 ‘보살님’이시고 아침마다 기도를 하신다. 아침마다 들리는 소란스러운 기도소리는 든든했다. 우리들의 안녕을 바라며 이토록 외치는 사람이 있으니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들이 저 소리를 듣고 내가 너무 망쳐지지 않을 만큼은 보호해 줄 수도 있겠다고 막연하게 믿을 수 있었다. 할머니의 영향을 받아 무교라고 주장하면서도 불국사에서 사 온 나무반지를 매일 착용하고 다닐 정도로 ‘불교’라는 종교와 나의 일상은 가깝다. 다른 한국사람들도 흔하게 무교라고 말하지만 자연스레 스며든 불교적 신념들은 “다음에는 꼭 인간으로 태어나라.”라든지, “다음에는 좋은 곳에서 태어나라.”라는 말을 하게 한다. 불교의 윤회 사상. ‘우울증 환자’이기에 그럴 수도 있지만 ‘윤회’라는 사상은 다시 생을 거듭하는! 그래서 언젠가 마땅히 있을 길고 긴 안식조차 기대하지 못하게 해서 반갑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은 것은 믿지 말아야지! 이런 나의 선택적 신념과 믿음으로, 도로 한 편에 쓰러져 차갑게 식어간 생명들을 위한 기도에는 다시 태어나라라는 말이 포함되지 않는다. 어디든, 어떤 형태이든 ‘바라던, 좋은 곳. 편한 곳’으로 당도해서 쉴 수 있기만을 바란다.



언젠가 편히 쉬어갈 수 있을 때가 되면 다시 태어나라는 무서운 말대신
“좋은 곳에 가라. 꼭 좋은 곳에 가라”라는 말을 듣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마음 한 조각, 조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