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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순영 Jun 08. 2022

지식은 올곧게 미래로 이어져야 한다

한나라에서 교훈을 얻다 1_ 곡학아세曲學阿世


제齊나라의 원고생轅固生은 시경詩에 정통해 박사가 되었다. 그는 성품이 강직해 평소 그 누구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노자의 도가에 심취한 효문황후(한경제의 어머니)가 원고생에게 노자의 글에 견해를 물었다. 


“그따위는 노비나 종년들이 좋아하는 짓이지요.” 


정통 유가파였던 원고생이 도가를 폄하하여 대답한 것이었는데 국왕의 어머니인 효문황후가 궁중 무수리 출신이었던 것이다. 


“살아나려면 저 멧돼지를 쓰러뜨려야 할 것이다.” 


울화가 치밀어 오른 효문황후가 노령의 원고생에게 낡은 칼 한 자루를 쥐어주고 사나운 멧돼지와 싸우도록 했다. 말버릇 고약한 노인네의 죽음을 직접 보고자 했음이다. 

이 일을 전해 들은 경제가 예리한 보검을 내주어 원고생은 멧돼지를 죽이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원고생이 탐탁지 않았겠지만 경제는 그의 청렴하고 올곧은 성품을 높이 사 청하왕의 태부로 임명하였다. 그 후 몸이 쇠약해져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경제에 이어 왕위에 오른 무제가 원고생을 다시 중용했다. 이때 원고생의 나이가 아흔 살이 넘었다. 


“죽을 날이 가까운 사람을 불러내 벼슬자리를 주다니요.” 


신하들이 원고생을 얕잡아보며 헐뜯었고 함께 왕의 부름을 받은 젊은 학자 공손홍도 못마땅해했다. 학자로서의 기본을 내던진 채 출세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공손홍에게 원고생이 정문일침의 충고를 했다. 


“지금 세상은 학문의 정도가 어지러워져서 그 근간이 흔들릴 지경이네. 이대로 간다면 유서 깊은 학문의 전통은 그 본연의 거치를 상실하고 말 것일세. 자네는 학문에도 깊이가 있고 젊으니 부디 올바른 학문을 널리 전파해 주었으면 하네. 자신이 믿는 학설을 굽혀(曲學) 세상 속물들에게 아부하는 일(阿世)이 있어서는 안 되네.” 


원고생의 말은 도가를 비롯한 여타 학설을 경계하고 유가에 충실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원고생의 충고를 깊이 새겨들은 공손홍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원고생의 제자를 자청해 훌륭한 학자로 거듭나게 된다. 이 후로도 제나라에서 시경을 논하여 이름을 높인 이들은 원고생을 학문의 롤모델로 삼았다.  

사기史記의 ‘유림열전(儒林列傳’에 공손홍에게 원고생이 한 말에서 학문을 왜곡해 세상에 아부한다는 뜻의 곡학아세曲學阿世가 유래했다.

흔히 출세나 권력욕에 치중하는 지식인을 비판하거나, 허황된 학설로 세상을 현혹시키는 사람들을 빗댈 때 인용한다. 지닌 학식을 불의한 곳에 활용한다면 곡학아세의 유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어용御用이라는 용어의 활용도가 높은 요즘 사회다. 임금이 쓰신다는 당초의 사전적 의미에서 자신의 이득을 위해 권력과 영합하는 처세의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대학 교수가 학자로서 지닌 전문 지식이나 소신을 현실에 반영시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한다면 곡학아세나 어용교수라는 말로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치politics와 교수professor를 합쳐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현직 교수를 일컫는 신조어, 폴리페서polifessor라는 용어도 생겼는데 정치적 권력이나 명예를 얻기 위함이 강한 경우에 쓰는 말인 듯싶다. 

설사 그들의 정치 참여 목적이 권력이나 명예 등을 얻기 위해서일지라도 이를 지나치게 매도하는 것은 유교적 경향에 너무 치우친 사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식인의 머리에 가득 든 경륜을 가슴으로 내보냄으로써 그들의 지식이 이 세상에 가치 있게 전승되기를 염원할 뿐이다. 







한나라 시대



초한 대전에서 승리한 한 왕 유방이 황제의 제위에 올라 한 고조가 되면서 한나라 시대(BC 206~AD 220년)가 열린다. 한나라가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건 유력한 제후들이 항우의 초나라를 배신하고 한나라를 따랐던 이유가 컸다. 

한 고조가 귀순한 제후들과 건국 공신들에게 논공행상하면서 성씨가 다른 일곱 명의 공신을 제후로 봉하고 140여 명을 열후列侯에 봉하였다.

이 당시의 제후는 왕이라 칭했는데 봉토가 많은 제후는 100여 개의 성을 점유하였고 적은 제후도 30~40개 현을 차지하고 있어 천하의 절반이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한나라 시대는 봉건제와 군현제를 병행한 군국 제도郡國制度를 실시하였으나 제후들이 점유한 지역이 넓었고 그들의 존재감이 부각되면서 한 황실에 위협으로 다가왔다. 

또 제후들은 오랫동안의 전쟁 경험으로 군사에 능하여 야심 여하에 따라 한나라 황실에 커다란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이에 한 고조는 정치적 안정을 이루면서 서서히 성씨가 다른 이성 제후異姓諸侯와 공신들의 세력을 약화 또는 소멸시킨 뒤 유 씨를 제후로 봉하였다. 

한나라는 건국 후 215년이 지난 서기 9년에 왕망이 정변을 일으켜 신나라를 건립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서기 25년에 한나라 왕조의 후예인 유수가 신나라를 무너뜨리고 다시 한나라를 건립했으니, 그가 광무제이다. 

역사에서는 한 고조 때부터 신나라 건립 때까지를 전한(서한)으로, 광무제의 한나라 재건국부터를 후한(동한)으로 구분한다. 

후한은 서기 220년, 마지막 황제인 헌제가 강압으로 조조의 아들 조비에게 제위를 선양함으로써 한나라 시대의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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