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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빈작가 Oct 20. 2022

자랑스러운 딸, 부담스러운 딸


우리 엄마한테는 나밖에 보이질 않는다. 

우리 가족이 엄마를 모시고 외식을 했다. 

무슨 날이었는지는 딱히 기억나지 않지만 특별한 날로 소고기를 먹으러 갔을 때였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라는데 아직도 엄마에게는 딸이 먼저다. 

남편이 고기를 구워서 장모님 드시라고 드리면 엄마는 그것을 나에게 먼저 준다. 

사위를 먼저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엄마 마음을 잘 알기에 감사히 받아먹는다. 

심지어 할머니들은 손자 손녀를 가장 예뻐하고 먼저 챙기신다 하셨는데, 우리 엄마는 손녀딸 보다도 내가 먼저다. 

남편은 이해는 한다고 하지만 섭섭한 눈치이고, 나는 이것이 너무 부담스럽다. 

춘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중학교 때까지 나의 성적은 상위권을 유지했다. 

그러나 아버지 아프셨을 때부터 공부에 손을 놓았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수업시간에 많이 자면서 보냈다. 

그리고 수능 시험을 보고 대학을 몇 군데 지원했었다. 

수능 점수도 워낙 안 나왔었는데, 딱히 목표가 없다 보니 그냥 고3 담임선생님께서 써 주신대로 갔다. 

몇 군데 지원 후 춘천의 한 대학에 단번에 합격하지 못하고, 후보로 있다가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모습이 그리 자랑스럽지는 못했다. 

그런데 엄마는 누구를 만나면 그렇게 자랑을 하고 다니셨다. 

혼자 있으면 괜찮은데, 같이 있을 때 그러시면 너무 창피했다.    

  

“얘가 강대 이번에 들어갔어요.” 

“얘가 강대 4년제 나왔잖아.” 


입학부터 졸업 이후까지 계속 자랑을 하셨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자랑을 하셨다.     

 

“아니 그런 얘기를 왜 하는 거야? 하지 좀 마” 


뭔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그저 내가 자랑스러웠던 거 같다. 

대학을 못 가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대학은 간 거, 2년제 대학을 갈 수도 있었는데 4년제 대학을 간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엄청 부끄러웠다. 

한동안 엄마한테 하지 말라고 대구하고 실랑이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엄마한테 대들지는 않았다. 

부끄러웠지만 그냥 나를 자랑하고 싶은 엄마의 낙이려니 생각하기로 했다. 

이웃에 아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 거고, 혹시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뭐 또 만날 것도 아니고 이렇게 생각하며 지켜보곤 했다. 


대학 졸업 후 3군데의 회사를 다녔다. 

마지막 회사를 17년 5개월 근무했다. 

그 회사 처음 입사하고 몇 년 뒤 미국으로 출장을 갔다. 

그 후 년 1회씩 3번 다녀왔다.      


“얘가 외국도 엄청 많이 다니고, 영어도 잘하고”

또 만나는 분들마다 자랑을 하신다.      


‘아 이건 아닌데. 잘하긴 뭘 잘해. 좀 그만 좀 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속으로만 소리를 내고, 겉으로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꾹 참았다.

늘 엄마의 관심과 자랑이 부담스러운 짐으로 나의 어깨를 눌렀다.      

밖에서 엄청 자랑하고 싶고 대견한 딸이었음에도 뭔가 엄마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잔소리를 한다거나 짜증 나는 말로 대하기가 일수였다. 

엄마의 기분을 맞추기가 영 힘들었다. 

    

이현주 작가의 <나는 왜 엄마가 힘들까>는 나르시시스트 엄마에게 고통받는 딸을 위한 책이다. 

우리 엄마가 나르시시스트는 아니다. 

기록된 부분에 보면 안 맞는 부분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가 얘기하는 부분 중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다.      


엄마를 중심으로 5가지 역할이 있다. 


돌보는 자 : 가족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으며,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마스코트 : 가족을 즐겁게 해주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한다. 마스코트는 희생양이나 학대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영웅 :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트로피이자 전리품이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영웅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고, 이 때문에 영웅은 조건적인 사랑을 받는다. 

희생양 :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정적인 것을 감당한다. 예민하고 감정적인 희생양은 부모에게 가장 미움을 받는다. 가족 모두 희생양을 공격하며, 희생양이 갈등을 조장한다고 여긴다. 

잃어버린 아이 : 가족 구성원이 많은 경우 생기는 유형이다. 이들은 부모에게 학대를 당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관심을 받지도 않는다. 희생양을 학대하는데 동조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분리를 해놓고 뒷부분에 예쁨 받다 미움을 받을 수도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만약 당신이 외동이라면 당신은 다섯 가지 역할을 모두 수행했을 것이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영웅이자 희생양이었다.      


친정 엄마를 그대로 닮은 나     


작년 9월에 아이와 함께 <엄마와 아이가 함께하는 스마트폰으로 이모티콘 작가 되기> 란 책을 출간했다.      

“담임 선생님께 너 책 나온 거 얘기해야 하지 않아?”

“싫어하지 마. 창피해”

“그럼 학원 선생님께는?”

“아니 그런 걸 왜 얘기해?” 

“자랑스럽잖아. 대단하기도 하고 멋지다 해주실 걸.. 책도 홍보하고 ”

“하지 마, 하지 말라고 했다.”      


다행히 나는 엄마처럼 저지르지는 않고 아이에게 미리 물어보았다. 

아이가 펄쩍 뛰며 싫어한다. 

어느 날인가 아이가 반 친구들을 이모티콘으로 작업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학교 가면 각 친구들에서 선물로 준다며 그림 그린 것을 인스*로 만들고 있었다. (* 인쇄소 스티커라고 스티커에 칼선이 없이 통으로 되어있는 것을 뜻한다)      


“고은아, 너 친구들은 네가 이모티콘 작가인 거 알아?”

“아니, 애들이 그걸 어떻게 알아” 

“왜 얘기를 안 해?”

“아니 그걸 왜 얘기해? ”

“친구가 그냥 이모티콘 그려서 주는 거랑 이모티콘 작가님이 그려서 주는 거랑은 다르지. 더 좋아하지 않을까 해서”

“창피해. 말하지 마 ”      


뭐가 이렇게 창피한 것이 많은지 엄마를 부끄러워한다. 

내가 엄마를 대하는 마음이 이런 거였을까? 

내가 아이를 대하는 이 마음이 우리 엄마가 나를 자랑하고 싶은 이 마음이었을까? 

아직도 엄마의 마음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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