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지나쳐 주세요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서는 예술적 재능이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만한 사실이다. 더불어 노력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선천적인 ‘무엇’도 가지고 있다면 작가는 더욱 빛난다. 작가는 캔버스에 자신이 바라본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가져오기도 하고 마음을 투영하여 환상적인 마법을 부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 시선은 관객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고 공감을 불러오기도 낯섦을 느끼게도 한다.
가끔 익숙했던 장소가 갑자기 어색해지고 처음 방문한 장소가 낯설어 마음이 뭉글해지는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 찰나의 순간을 담아두고 싶은 마음이 불끈 솟아올라 핸드폰 카메라를 켜고 각도를 달리하며 연달아 사진을 찍는다.
아! 멋지게 잘 찍혔겠지! 뭐 사진 꽝손은 아니니까......?
그러나 한참 열정을 쏟고 난 후 찍은 사진들을 살펴보다 보면 내가 뭘 찍은 건지 모르겠고 실망스러워진다. 렌즈가 담아낸 기억이 나를 농락하는 것만 같다.
사진기의 혁명적 진화는 주관적인 감흥을 담지 못해 매력 없다고 쉽게 매도당한다. 마음은 가라앉고 추억은 이미 바래진다. 반복된 좌절은 나의 눈에 닿은 찬란한 나만의 기억 그대로를 표현한 무엇을 갖고 싶다는 욕망을 부추긴다.
이건 화가의 고민이 아니다. 그저 나의 가슴속에 품은 그것을 나의 의도대로 그리고 싶은 어린아이 같은 꿈이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근본적인 장애물에 헛발질만 해댔다.
나의 마음을 담고 싶어서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녹화한다. 일기는 글을 쓸 줄 알면 우선 한 글자라도 적을 수 있고, 영상은 녹화 버튼을 누를 수만 있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소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림은....... 직선 하나 긋고 나면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꺾어서 위로 올라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땅만 판다.
마음에 도장처럼 새겨진 풍경은 내가 연필을 든 순간 그 형태가 뭉개지고 흐릿해져 버린다. 내가 본 것이 정말로 그것이었던 것인지 이제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인도 위, 그 위를 공허한 눈으로 빈 공간을 찾아 걸어간다. 앞에서 오는 사람 중 누군가를 나를 힐끗 쳐다본다. 상대가 나를 본다는 것을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라 그 각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흐릿한 형체를 보아 누군지 짐작해 본다. 곧 상대는 나를 지나쳐간다. 인사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냥 아예 본 적 없는 사람처럼 지나친다. 바로 본 것도 아니니 틀린 말은 아니다. 곁눈질로 본 대충 형태로 누군지 짐작만 할 뿐 나는 상대를 확인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무엇을 알고자 하면 그것에 집중하고 시간을 할애한다. 관심이 없으면 시선을 거둔다.
나와 너의 거리를 조절하는 데 실패하고 너에 대한 반가움과 두려움이 섞인 복잡한 감정이 나를 지배했다. 내가 아닌 너는 우리가 되지 못했고, 언제나 이방인으로서 너로만 존재했다. 너를 끌어안고 싶다가도 흠칫 놀라 뻗은 손을 재빨리 회수했다. 너를 보고 싶다가도 모든 게 나의 오해였다고 오해, 오해였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하기도 했다. 그런 마음으로 이제 나는 너를 반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미리 상처받은 것처럼, 앞으로 받을 상처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는 주변 사람들을 보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앞을 제대로 보지 않고 살았다.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저 하늘이 무슨 색으로 물들었는지 보지도 못하고 텅 빈 채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세상은 희미했고 내가 서 있는 곳도 어딘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을 마음으로 보고 우리의 관계를 똑바로 직시해야 후들거리는 두 발을 이 세상에 굳건히 내딛을 수 있다. 나는 새로운 마음을 먹었고 보이는 것들에 마음을 다해 보기로 한다.
그러고 나면 나의 그림 실력도 좀 늘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리기 감각이 형편없어 원하는 만큼은 아닐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