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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이야 Jan 21. 2022

오늘도 내가 졌다!

아, 오늘만 같아라.


수요일 13:30

KO1패


몇 달 전 같은 동 13층에 사는 친한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거실 테이블을 치우려는데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아이는 둘, 책상은 하나던 때라 일단 업어오긴 했는데, 가로 180cm x 세로 80cm짜리 테이블은 한동안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둘째 방을 창고로 만들어버렸다. 커다란 테이블이 작은 방을 꽉 채우고 있으니 놀기도 자기도 애매한 공간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최근 각각 아이들 방을 만들어주며 첫째 방으로 옮겨간 테이블. 오른편에 데스크톱 컴퓨터를 올리고, 벽 쪽으로 긴 책꽂이를 놓았는데도 공간이 널널했다. 덕분에 둘째는 제 방 책상을 제쳐두고 형 옆에 나란히 앉아 그림을 그리곤 한다. 쓱싹쓱싹 흥얼흥얼. 색연필 채색 소리와 첫째의 허밍 소리가 고요한 집 안을 채운다.


그렇게 점심식사 후 아이들은 꼼짝 않고 내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게임이 아닌 무언가에 집중하는 아들들의 모습은 너무도 예쁘다. 가만히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울컥할 때마저 있으니 말이다. 그 어여쁜 모습에 난 KO(knocktout) 당하고 말았다.


"아, 오늘만 같아라."




수요일 13:55

KO 2패


하지만 수요일 오후 2시. 첫째는 미술학원, 둘째는 피아노 학원에 가야 할 시간이다. 간만의 평화로운 시간이 못내 아쉽지만, 출발 30분 전부터 아이들에게 시간을 상기시켜준다.


"학원 갈 시간이야. 그리던 거 마무리해."

허공에 메아리치는 나의 목소리.


"양치하고 나갈 준비 해라."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엄마 빨래 널고 올 테니까 그동안 준비해."

여전히 조용한 집안.


"1시 50분인데 뭐 하고 있어?"

빨래 널고 왔는데 아직 칫솔을 물고있는 첫째.


"양치하는데요."

누가 몰라서 묻냐?


"준이(동생) 어디 갔니?"   


"몰라요."

대궐 같은 집도 아니고 방금 전까지 함께 앉아 있던 동생이 어딨는지 모르겠다고? 그런데 정말이다. 이 방에도, 저 방에도 아이가 보이질 않는다. '얜 준비 안 하고 어디 있는 거야?' 핸드폰을 켠다.


"준이 어디니?"


"저 피아노 학원 도착했는데요?"


아이 목소리 뒤로 딩동 딩동 피아노 소리가 난다.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게냐? 5분 만에 그림 마무리하고, 양치하고, 옷 갈아입고, 피아노 학원에 도착하는 게 가능하다고? 쨉, 쨉, 휙! 휙! 바람처럼 잽싼 둘째에게 그렇게 나는 KO 당했다.


Photo by frank busch on Unsplash




수요일 14:00

KO 3패


휴대폰을 내려놓고 뒤돌아서니 여전히 칫솔을 문 채 욕실 거울 앞에 서 있는 한 분이 보인다. 같은 5분을 어쩜 저렇게 다르게 쓸 수 있지? 잔소리가 올라오는 걸 꾸역꾸역 눌러 담았다. "엄마, 이렇게 쫙 붙이는 게 나아요? 아니면 자연스럽게 내리는 게 나아요?" 한창 최 준 스타일에 꽂힌 첫째가 거울 속으로 들어갈 듯 붙어 서서 손가락으로 한 올 한 올 앞머리를 정리하며 묻는다. 하아... 주문을 외워야 할 시간이다.


최 준 스타일에 꽂힌 첫째


난 지금 집 밖이다.

쟤는 옆집 아들이다.


난 지금 집 밖이다.

쟤는 옆집 아들이다.


난 지금 집 밖이다.

쟤는 옆집 아들이다.



양치와 앞머리 손질을 마친 첫째는 두툼한 패딩을 제쳐두고 오늘은 모자 달린 남방을 세 개 겹쳐 입었다. 움직임이 자유 로울리 없다. 아이는 온몸을 베베꼬며 말했다. "아, 답답해. 엄마, 왜 이렇게 작은 옷을 샀어요!!!"  다 똑같이 L 사이즈다. 하지만 세 겹이나 껴입다 보면 마지막 입은 옷이 작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니? 편하게 점퍼 입고 가라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다. 이미 2시가 넘었다. 일단 이 녀석을 얼른 내보내야 한다.


"낮이라 기온 좀 올라서 두 개만 입고 가도 될 것 같은데?"


"아하~ 이제야 좀 낫네."


맨투맨 티셔츠 위로 남방 두 개를 겹쳐입은 아이의 얼굴은 '좋았어, 이제 모든 것이 완벽해!'라는 표정이다.  슬리퍼(!!!!)에 발가락을 슉슉 끼워 넣고 콧노래를 부르며 현관나서는 녀석. 이런, 방심했다! 안 보이는 곳에 치워버려야지 했던 슬리퍼를 또 깜빡하다니... 털썩,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KO 당했다.


아... "오늘만 같아라"하던 30분 전으로 돌려다오!

냉장고 속 맥주가 나를 부른다. 3시 둘째 치과 스케줄이 없었다면 이미 파울라너 캔 뚜껑을 따 제쳤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3 연속 KO완패.


"아, 오늘도 내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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