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이야 Feb 22. 2022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1)

feat. 알랭 드 보통


12/22.. 12/22.. 12/22..??


날짜를 적는데 숫자가 자꾸 거슬린다. 낯익은 네 자리 숫자. 무슨 날이었던가? 올케 생일인가? 아닌데, 올케 생일은 12월 12일인데. 뭐였지, 뭐였더라?... 아, 맞다. 결혼기념일! 5,6년 전부터 한 해 건너 한 번씩 이렇게 까먹는다. 모르고 한참을 지나버린 적도 있으니 올해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 하겠다. 어쨌든 결혼 후 열 해 하고도 삼 년의 시간이 흘렀고, 동갑인 우리 그와 나는 마흔 중반의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그야말로 쓴 맛 신 맛 더러운 맛 다 보며 살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의 말마따나 사실상 몇 번의 이혼과 재혼을 겪으며. 오직 한 사람과 말이다.


결혼한 지는 16년이 되었지만 이제야 좀 늦게 라비는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낀다. 라비는 자신이 단 한 번 결혼했다는 입장을 고수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언어의 교묘함 덕분이라는 점을 알아본다. 겉으로는 편리하게도 단일한 관계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 수많은 진전, 단절, 재협상, 소원한 기간, 감정적 회구가 깔려 있어 사실상 그는 적어도 열두 번은 이혼과 재혼을 겪어온 셈이다. 오직 한 사람과 말이다. (p277)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중



얼마 전 양육 문제로 충돌이 있었다. "애들이 부모 머리 꼭대기에 있다"며 욕설을 내뱉고 동굴로 들어가 자물쇠를 채우는 남자. "왜 욕을 하느냐"며 뒤따라가지만 문턱도 못 넘어보고 입을 닫아버린 여자. 슬그머니 동굴을 나와 평소처럼 말을 걸며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시작도 못한 이야기를 혼자 끝내버린 남자. 누다만 똥 같은 찝찝함, 무시당했다는 분노감으로 여전히 입을 닫은 여자. 이런 상황에 결혼기념일이 대수랴. (뭐 좋은 일이라고!)


기대하지도 기대지도 않기로 했다.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저녁이 다 되어 근처 아울렛으로 차를 몰았다. (성인이 된 이래, 잘한 걸까 아닐까 고민 없이, 무조건 잘한 유일한 일. 취업도 결혼도 출산도 아니다. 5년 전 딴 운전면허다.) 최근 만보 걷기를 시작하며 엄지발가락 통증이 시작되었다. 딱딱한 컨버스화를 신고 두 시간씩 걸어서인 듯하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고 미루던 런닝화를 사러 갔다. 정가 20만 원짜리 운동화를 지를까 하다 이내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놈이 그놈인 수백 켤레의 운동화 중 그럭저럭 마음에 들면서도 70%나 할인 중인 놈으로 골랐다. 쇼핑도 결혼도 인생도 선택의 연속이다.



우유, 당근, 시금치, 아이들 장난감이 아닌, 오롯이 날 위한 무언가를 고민하고 비교해 보는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격은 중요치 않다. 비싼 만큼이 아니라 날 위한 시간만큼이 행복이다. 기대하지도 기대지도 않겠다 해 놓고는, 운동화를 남편 명의의 생활비 카드로 긁었다. 돌아오는 길이 영 찜찜하다. 다이어리 맨 뒷칸에 넣어둔 쌈짓돈이 생각났다. 생일날이었던가 입원 때였던가 암튼 누군가에게 받아서 봉투째 넣어둔 현금이다. 에라, 모르겠다. 돌아와 맥주 한 캔을 깠다. 양심상 '살 빼야 하는데' 한 마디는 잊지 않았다. 12년에서 13년으로. 한 해 더 결혼생활이 유지되었음을 자축한다.


(다음 편 계속)



위 글은 2020년 12월에 쓴 글입니다.

지난 1년 여간 블로그와 브런치에 글을 쓰며 얻은 의외의 소득은 '남편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위태롭던 그때의 그와 나를 돌아보고 현재의 서로를 바라보며 미래의 우리를 그려봅니다.


Photo by Kelly Sikkema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나, 그리고 우리를 닮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