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와가치 Sep 12. 2021

현지 학교 적응기 2

베트남 이야기 8

베트남 학력고사를 치르고 고등학교에 무사히 입학한 큰딸은 자신감을 얻었는지, 성적이 점점 더 올라갔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아마 첫 학기만 빼고) 졸업할 때까지 줄곧 우등상(평균이 8점을 넘어야 한다)을 놓치지 않았다. 큰 딸은 그렇게 성실하게 자신의 자리를 단단하게 만들어 갔다.




언어가 완전히 통하지 않는 현지 친구들과 자주 어울려 놀고 종종 친구 집에 가서 파자마 파티를 하고 오기도 하는 작은딸은 크게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도 공부에 별로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현지 학교에 들어가 낮은 점수에서 오래도록 머물러 있더라도 숙제는 빠짐없이 꼬박꼬박 해가는 데다 학교 생활이 즐거워 보이니 다행이다 싶었다. 아니, 현지 학교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대견하고 신기할 뿐이었다. 현지 학교에 적응하기 위해 성적을 가지고 몸부림치던 예민한 큰딸보다는 차라리 작은 딸의 그 느긋한 성격이 다행이다 싶고, 천천히 배우면 되지, 그저 밝고 씩씩하면 됐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작은딸의 4학년 때 베트남어 노트


초등학교를 마무리 중이던 5학년 봄 어느 날, 작은딸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담임 선생님이 학부모를 부른다는 것은 뻔한 일이다. 하긴, 한 번쯤 부를 만도 했다. 작은딸이 지금까지 무탈하게 보였던 것은 '초등학생'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내 예상 대로였다. 담임 선생님의 기나긴 메시지와 그에 따른 요지는 이러했다. 현지 학교에 들어온 지 2년이나 되었는데 작은딸에게서 발전의 기미가 전혀 안 보인다, 곧 중학생(6학년)이 되는데 이렇게 준비를 안 하면 곤란하다, 지금부터라도 공부를 빡세게 시켜서 중학교 성적을 잘 받아야 고등학교도 보낼 수 있을 거 아니냐, 엄마가 좀 더 신경을 좀 써 달라는 것이다. 선생님 앞에서 어쩌겠는가, 앞으로 신경을 쓰겠다고 대답을 하고 나왔다. 초등학생이라 그런가 큰 아이 담임 선생님과 대화 나눌 때 내 마음을 상하게 했던 각서 따위는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큰 아이의 담임 선생님에게 훈계를 들을 땐 마음이 많이 상했었는데 둘째라서 그런가, 내 속으로는 '작은딸이 이제는 간단한 베트남어도 잘 구사하고 아직은 어리니까 이만하면 만족하는데...' 그러고 있었다. 두 아이를 기르면서 아무리 똑같이 양육하고 있다고 나름 생각을 해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는 것은, 둘째를 양육하는 마음가짐은 첫째보다 훨씬 여유가 있고, 겁을 내는 일도 확실히 덜하다. 


선생님의 호출 이후 초등학교 마지막 기말고사가 있었지만 작은딸은 여전히 미동하지 않는 실력으로 초등학교를 마쳤다. 현지 학교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것만으로도 우리 부부는 그저 기특하고 대견할 뿐이었다. 성적에 전혀 관심 없는 딸이 외국어 하나는 건졌지 않은가...




6학년(중학생)이 되자 담임 선생님이 바뀌었다. 그런데 중학교 때 큰딸을 담임했던 분이 작은딸을 담임하게 되었다. 처음엔 일단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큰딸의 성실함을 인정하고 나중에는 큰딸을 예뻐하게 된 선생님이었기에 시간이 지나서 작은딸도 베트남어가 더 유창해지면 선생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거라고 믿었기에.


6학년 1학기 시험이 끝나자마자 선생님의 호출이 왔다. 성적 때문이겠지, 예상을 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선생님 앞에 앉았다. 이제 선생님이 어떤 말씀을 하실지 스토리가 내 머릿속에서 전개되었고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 후로도 2학기 시험이 끝나고 나서 불려 가고, 7학년이 되고서도 나는 불려 갔다. 그쯤 되니 나는 해탈한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이 선생님과 앞으로 2년 반을 더 봐야 해, 머지않아 각서를 쓰라고 하겠군...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어느 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 놓고 집 청소를 하고 있는데 같은 층에 사는 이웃집 여인이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이 집 작은 딸이 1층에서 울고 있으니 어서 내려가 보라는 것이다. 응? 그럴 리가... 아침에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 타는 것까지 봤는데 무슨 상황이지?

1층으로 내려갔더니 작은딸이 아파트 1층 현관에 서 있었다. 눈이 촉촉이 젖어 있기에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도, 엄마가 학교에 데려다 주랴, 집으로 올라갈까, 아무리 물어봐도 꿈쩍도 안 했다. 큰 딸은 얼마 전부터 전기 자전거를 타고 동생과 따로 학교에 다니니 이 상황을 알 수도 없을 거고. 그날 딸은 아마 그 자리에 한 시간도 넘게 서 있었던 것 같다. 결국 작은딸은 현지 학교를 들어간 후 처음으로 결석이라는 걸 했다. 


어찌어찌 달래서 집으로 돌아와 무슨 상황인지 물으니, 베트남 학교에 더 이상 다니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엄마가 보기엔 친구들과 관계도 좋고,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 같은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느냐고 물으니 담임 선생님이 매번 '네 언니는 안 그랬는데 너는 왜 성적이 오르지 않느냐, 네 언니는 적극적이던데 너는 왜 언니랑 다르냐' 등 수시로 언니와 비교하면서 친구들 앞에서도 저를 함부로 대하는 것에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며 펑펑 우는 것이었다.  


학기 때마다 일 년에 겨우 두 번 호출 당해 가서 듣는 잔소리도 짜증 나는데 작은딸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공부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매번 언니와 비교당하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왜 그동안 엄마 아빠한테 말도 못 하고 참았느냐고 물으니 딸이 울면서 말했다.

"나도 언니처럼 잘하고 싶었고, 엄마 아빠한테 칭찬받고 싶었어. 언니처럼 잘 참으면 될 줄 알았지."  


큰딸이 동생을 붙들고 지금까지 베트남어 배운 게 아깝지 않으냐, 언니도 힘들었고 많이 울었지만 열심히 하니까 되더라, 그러니까 언니랑 끝까지 가보자, 그렇게 설득을 했다는데도 작은딸의 마음은 열리지 않았다. 상처가 너무 깊었는지 그 후로도 작은딸은 아주 오랫동안 입을 꾹 닫고 지냈다.

 



우리 부부는 작은딸을 너무 잘 안다. 다른 아이들보다 시간이 좀 더 필요했던 것뿐이다. 아이들마다 다 달라서, 생후 12개월도 안 되어 이미 여러 단어를 잘 사용했던 큰딸처럼 뭐든지 터득하는 것이 또래보다 빠른 아이가 있는가 하면, 36개월 되어서야 뒤늦게 말문이 터진 작은딸처럼 템포 늦은 아이가 있다. 정말 그랬다. 작은 아이는 항상 한 발 더디게 따라왔지만 기어코 해내는 딸이었다. 베트남 담임 선생님의 태클(?)만 아니었으면 작은딸도 충분히 현지 학교에 적응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딸은 거의 말을 하지 않은 채로, 그래도 베트남 학교의 나머지 수업 일수를 채우고 7학년 종업식 및 여름방학과 동시에, 3년간 다니던 베트남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2017년 5월 말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현지 학교 적응기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