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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와가치 Sep 15. 2021

때로는 침묵이 필요합니다

과거 완료형 8

아기를 입양하고 나서 가장 신경 쓰이고 불편한 공간이 생겼다. 12층의 우리 집 밖 현관문부터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에 세워진 남편의 차가 있는 딱 그만큼의 공간, 혹은 아파트 출입구까지다. 


그동안에는 오며 가며, 혹은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도 같은 건물에 입주해서 사는 주민이라는 이유로 예의 상 가벼운 목례 정도만 나누고 각자의 사생활에 대해서 한 번도 관심 없던 사람들의 반응은 여러 가지였다.


아기를 안고 다니는 내 모습을 마주했을 때, 한 부류는 가벼운 목례를 하고도 여전히 나에게 관심이 없는 주민들이 있는가 하면, 한 부류는 서로 친하지는 않지만 그동안 보이지 않던 아기를 안고 다니는 나에게 말을 붙이는 것이 실례일까 망설이다가 결국 말없이 자기 갈 길로 가는 부류이고, 나머지 한 부류는 그동안 서로 말 섞은 기억도 없는데 갑자기 나에게 관심 지수가 가득 올라 호기심 어린 눈과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지는 주민이다.


첫 번째 부류에게 드는 생각은 친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고 두 번째 부류에게 드는 생각은 궁금한데도 잘 참아주시니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세 번째 부류, 나에 대해서 관심도가 갑자기 열 배로 올라온 분들을 상대할 때 나의 신경세포가 뇌 한쪽으로 몰리며 방어 자세를 취하게 되는 일이 간혹 있다. 


질문의 정도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훅 들어오면 일단 대답하기가 싫어진다. 충분히 조심스럽게 말을 잘 조절해서 물어올 수도 있는데 저돌적으로 질문을 해오는 사람이 있다. 기분이 먼저 상한다.


그래서 나 스스로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볍게 질문하는 사람에게는 나도 가볍게 넘어가자. 꼬치꼬치 캐물으면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자, 우리 부부가 입양한 게 죄도 아니고 말이지.


"어, 아기가 있으셨나요?" 하면 나도 친절하게 "네, 아기가 있어요." 한다.

"언제 아기를 낳으셨어요?" 하면 나도 웃으며 "조금 됐어요." 한다.


간혹 강적을 만나기도 한다. 위층에 사는 어떤 아주머니처럼. 아기 오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시작된 질문들...

"언제 아기를 낳았어요?" 질문 들어올 때 "네, 조금 됐어요." 대답했는데 이어서

"어머, 그랬구나. 나는 새댁이 배 부른 거 못 봤어요. 내가 왜 못 봤지?" 이러면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이런 말까지도 내가 굳이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데, 문제는 다음에 만나도 똑같은 말을 재차 묻는 집착을 보일 때다. 눈빛마저 불량스럽게 느껴진다.

"나는 왜 애기 엄마가 임신한 걸 몰랐을까? 분명 배도 안 불렀는데 아기 안고 다니길래 신기했다니까요."  


다른 주민들은 뭔가 좀 이상하거나 궁금해도 점점 자연스러워지면서 불편한 눈빛도 더 이상 주지 않고, 우리 모녀가 쏘다녀도 불편함 없게 해 주는데 그 집요한 아주머니는 나를 만날 때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거다.

"아기 많이 컸네요. 배 안 부르고 애기 안고 다녀서 신기하다 그런 게 엊그제 같은데..."


와, 진짜 이런 부류도 있긴 있구나. TV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남의 일에 관심이 너무 많아서 꼭 밝혀 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역할을 맡은 주민. 도대체 내 입에서 어떤 대답을 기다리는 거야? 그 아주머니의 눈빛도 기분 나쁘고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매번 똑같은 질문을 하는 것에 나도 정확한 대답을 안 하는 것이 오히려 아기한테도 미안하고 나 자신이 죄를 짓는 듯한 기분에 몇 번 기분이 상하곤 하던 참이었다.


한 번은 아기를 안고 외출하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서 내렸는데 아파트 입구 계단에 네다섯 명의 여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속에 그 집착녀도 보였다. 모른 척하고 지나가려는데 또 말을 건다.

"애기 엄마, 어디 가요?"

"네, 볼 일이 있어서요."

"다녀와요."라는 말에 가벼운 목례로 예의만 갖추고 그녀들을 지나쳐 이만큼 멀어져 나오는데 내 귀가 얼마나 발달되어 있는지 그들은 모른다. 점점 멀어지는 만큼 집착녀의 목소리도 작아지긴 했지만 분명히 들려왔다.

"저 애기 엄마가...처음에...... 배도... 안.. 부르........"


폭발할 것 같았지만 참았다. 뭐 어쩌겠는가. 궁금해 죽겠다는데... 정말 할 일 너무 없으시다. 저러고 싶을까... 앞으로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지? 화도 나고 약도 올랐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고민이 되었다.


얼마 뒤에 엘리베이터에서 집착녀를 또 만났다. 오고 가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그분을 내가 신경 써서 그런가 너무 자주 만나는 것 같다.

"에구, 애기 잘 큰다. 그때 요만하더니... 그때 내가 막 물어봤잖아요. 배도 안 불렀는데 애기 안고 다녀서..." 


"아주머니! 저 입양했어요. 많이 궁금하셨어요?" 

차갑지만 화는 내지 않고, 단호하지만 친절하게 말했다. 집착녀의 얼굴이 멋쩍은 듯 과하게 밝아진다.

"어머, 그렇구나. 나도 혹시나 했다니까요? 분명히 배도 안 불렀는데 애기 안고 다니니까 ... 어쩌구 저쩌구."


"이제 그만 해주세요. 저와 친한 사람들은 다 알아요.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뿐이에요."


밝은 얼굴의 집착녀의 얼굴이 불그스름해지며 대답한다. 

"그랬구나. 알았어요. 신경 쓰지 마요."

두 달 넘게 만날 때마다 신경 쓰이게 해놓고 신경쓰지 말란다. 미안하다는 말은 어차피 바라지도 않았다. 


그 이후에도 집착녀와 여전히 오고 가며 마주쳤지만 두 번 다시 나에게 배가 안 불렀었다는 둥 그런 쓸데없는 말은 멈추었다. 나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태연하게, 형식적으로라도 예의만 갖춘 목례만 하면서 지나다닌다.




그동안 나는 입양이 부끄러워서 그 아주머니에게 비밀로 한 게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 부부는 이미 공개입양을 선택했고,  어떤 상황들이 발생되더라도 그에 따른 결과들에 대해서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기에 그만한 일로 상처 따윈 받지 않는다.


다만 우리 부부처럼 공개입양을 선택한 가정이 있는가 하면, 각 가정의 사정으로 비밀입양을 선택하는 가정들도 분명히 있다. 고민하고 고민해서 어렵게 아기를 만났는데 주변 사람들의 특별한 눈빛과 피곤한 질문들로 또 상처를 받게 될 수도 있는 일이기에 그분의 행동에 화가 많이 났던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비밀 입양을 선택했더라면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해야 하나 고민했었을 수도 있다. 눈치 없는 척하면서 일부러 상대방에게 원치 않는 질문을 집요하게 하는 것은 폭력이다. 남의 일에 침묵이 필요한 사람들이 어딘가에는 꼭 있다.


그 아주머니는 다른 분들과 모여서 여전히 우리 집 이야기로 또 수군거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을 안 쓴다. 그 사람들이 우리 가정에 행복을 보태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이 지금처럼 행복하면 되는 거다. 


아이가 점점 커가면서 분명히 앞으로도 일어날 수도 있는 또다른 상황들이 생기겠지. 지혜롭게 잘 대처해 나갈 수 있도록 더 손 모아야겠다.


2001년 5월 10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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