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완료형 13
이제 겨우 '엄마'라는 정확한 단어 외에는 모든 대화를 옹알이와 눈빛으로만 해결하려는 딸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도 잠자는 시간만 빼고 아기의 시선은 항상 바쁘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제 앞에 펼쳐진 무지갯빛 세상을 구경하느라 바쁘고, 집에서도 눈이 바쁜 건 마찬가지다. 호기심 왕성한 눈으로 엄마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거나 장난감이나 책들을 가만 놔두지 않으니 음... 발달이 무척 빠른 것 같다. 그나저나 틈을 이용하여 딸과 조분히 앉아 진지한 이야기를 할라치면 배고프다, 놀아달라, 졸리다는 옹알이를 쏟아내며 도무지 엄마의 이야기에 대해 들을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딱 좋은 타이밍이 있기는 한데 그것은 내 품에 안겨 우웃병을 들고 맛있는 식사를 즐길 때다. 나도 이때가 싶지만 오만가지 생각으로 매번 망설인다. 밥 먹을 땐 건드리지 말자, 체할라... 아직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 뻔한데... 사실, 망설이는 이유는 나에게 있다.
우리 부부가 공개입양을 하기로 결정한 거였고, 어차피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게 입양 사실을 알렸으나 진짜로 이 사실을 알아야 하는 사람은 정작 우리 아기 본인이다. 언젠가는 이야기해주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그 시기를 언제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꾸만 갈등이 되었다.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는 유아기에? 초등학교에 들어갈 시기 즈음? 사춘기는 보내고 나서? 대학 졸업하고? 결혼할 때? 그것이 어떤 시기이더라도 우리 가족에게 닥칠지도 모를 어려움에 대해 상상하니 두려움만 생겼다.
아기를 입양하고 나서 참 잘한 일 중에 하나는 우리 가정과 같은 입양을 한 다른 가정들과 모임을 갖는 일이었다. 모임에 갈 때마다 다른 가족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메모도 해온다. 이 시점에서 우리 가정에서 가장 궁금한 '아이에게 입양 사실을 언제 알려주는 것이 가장 최선책인가?'에 대해 관심이 많은지라 다른 가정들의 경험담은 귀를 활짝 열고 듣게 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입양 사실을 말해 줬다는 A엄마는 3일 동안 방 안에서 나오지 않는 아들을 이해하고 설득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냈고, 청소년기에 본인의 입양 사실을 듣고 가출을 감행한 적인 있다는 B아빠는 본인도 입양아였고 결혼해서 아기를 입양한 케이스인데 청소년 시절에 방황이 심했었기에 이왕 알게 될 거라면 차라리 더 어린 시절이 더 나았을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성인이 되어서 입양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한 젊은 처자도 키워준 부모님에 대한 배신감과 동시에 이해하는 시간을 보내는 데는 너무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는 경험담은 입양 부모들의 눈물을 쏙 빼내고야 말았다. 어느 가정이나 사연이 있고 다양하다.
많은 경험담을 참고하여 우리 가족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아야겠지만 결론에 이른 것은 한 가지다. 부모나 아이 모두 크게 마음고생하지 않고 입양 이야기를 시작하는 가정들의 공통점은 입양된 아기들의 연령이 어리면 어릴수록 안전(?)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 아기에게 말하자. 생후 1년도 안 된 젖병 물고 있는 아기지만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모임에 다녀올 때마다 몇 번이나 시도해 봐야지 하면서도 그게 쉽게 되지 않았다. 아무리 어린 아기한테라고 해도... 어렵다.
몇 번이나 용기를 내었는데 자꾸만 눈물이 먼저 나오는 바람에 멈추었었다. 다음에 하자. 시간 많은데 뭐, 하면서...
오늘 다시 용기를 내어 보기로 했다.
아기가 내 품에 안겨 젖병을 두 손으로 꼭 붙들고 맛있게 식사 중이라 다른 것엔 관심이 없고, 편안한 시선으로 그나마 오래 엄마를 응시해 주는 이 시간이 딱 좋다.
"맛있어?^^"
꿀꺽꿀꺽...
"음... 딸, 고마워..."
긴 속눈썹 속으로 맑은 눈동자가 모처럼 진지한 엄마의 얼굴이 낯설은지 더 또렷이 바라보니 목이 멘다.
"음... 엄마한테 와줘서... 고마워..."
이 엄마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하는 표정으로 큰 눈을 더 동그랗게 하여 진지하게 바라보는 느낌이다.
"엄마가 널 낳지 못...."
내 발음도 이상하고 억양도 흐트러진다. 너무나 어색하다. 어린 아기한테도 진실을 말하는 것은 어렵다. 잔인한 것 같기도 하다. 사실은 이미 내 눈에서 눈물이 나오고 있어서다.
선배 엄마들 조언으로 아이에게 입양 이야기를 꺼낼 때 절대 슬픈 표정을 하면 안 된다는데 조절이 어렵다. 이러니 아기가 좀 더 큰 다음에 이야기해줄 땐 얼마나 더 어려울까 싶다. 잔인한 일 같아도 몇 번 이야기하다 보면 서로 익숙해지겠지...
"우리 아기... 엄마가 널 낳지 못했지만... 우리는 가족이야..."
꿀꺽꿀꺽...???
"우리는... 입양이라는 방법으로... 가족이 되었어..."
그러거나 말거나 꿀꺽꿀꺽... 먹성 좋은 딸이라 어떤 시련이 와도 거뜬하게 견뎌줄 것만 같은 믿음이 생긴다.
"엄마는 매일 감사해. 이렇게 예쁜 딸이 엄마에게 와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딸..."
자연스럽지 않은 목소리 톤뿐만 아니라 표정 관리도 너무 어려웠지만 처음으로 아기에게 입양 사실을 말해주었다.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는 건 알지만 이렇게 몇 번 말하다 보면 나도 덜 어색해지고 우리 아기도 어느 날 입양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날이 오겠지... 용기 내는 처음이 어렵지, 앞으로는 여유 있게 잘 말할 수 있을 거야. 원하지 않는 눈물이 조금 나긴 했지만 용기를 낸 나 자신에게 잘했다고 토닥여주었다.
가슴 떨린 엄마는 상관도 하지 않고, 다 먹은 우유병을 홱 집어던지더니 홀랑 내 품에서 빠져나가 엉금엉금 기어서 책꽂이로 간다. 그리고는 한 권씩 빼서 책들을 조신히 보는 게 아니라, 빠른 속도로 이 책 저 책 마구 빼서는 바닥에 뿌린다. 튼튼하니 힘도 엄청나다.
"야, 이 넘아! 책은 보라고 있는 거지, 밟고 다니라고 있는 거 아녀!!!"
조금 전에, 교양 섞어 떨리던 목소리로 딸에게 보드랍게 말을 걸던 나는 어느새 사라지고, 걸걸한 목소리로 시비 거는 내 모습만 남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먼저 전환해 준 딸에게 또 고맙다.^^
2001년 7월 26일 목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