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자책봉 Jun 06. 2024

퇴근 후 잡생각 1부

AI가 만든 이미지, 모자를 푹 눌러쓰는 것에 대하여

1. 예술에 대한 짧은 생각(코스모폴리탄 표지에 실린 AI가 만든 그림을 보며)


"AI가 만든 코스모폴리탄 표지"

2022년 6월 유명 잡지사 코스모폴리탄은 세계 최초로 인공지능(AI)이 만들어 낸 이미지를 표지로 채택했다. 그리고 현재 2024년 오늘날, 무수히 많은 매체에서 AI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다. 순수 인간의 노동력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에서 기계가 만들어낸 이미지로의 변화는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이뤄졌다. 이대로 일러스트레이터 직업은 사라지게 될까? 언젠가는 AI가 만들어낸 이미지가 온 세상을 지배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인간이 갖는 특수성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눈을 가리면 콜라와 사이다를 구분하지 못하는 게 인간의 한계고, 이것이야말로 인간적인 면모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저 AI가 만든 이미지를 보라. 비인간적인 색채와 형태를 가진 저 이미지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이질감은 인간의 한계에서 비롯된 감각적 초월감일까, 아니면 아직 AI가 충분히 학습되지 않았다는 증거일까?


"어도비 생성 AI, 지나치게 매끈하고, 지나치게 정교하고, 지나치게 선명하고, 지나치게 창의적이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창의성과 예술성의 영역을 아득히 뛰어넘은듯한 저 이미지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안타깝게도 저것에겐 인간이 노동을 들여 만들어낸 이미지에서 느껴지는 감흥이 없다. 저것은 인간이 만든 AI가 만들어낸 이미지다. 그러나 인간의 이야기가 담긴 이미지가 아니다.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수없이 고뇌한 흔적과 공들인 시간 그리고 여러 노력이 저기엔 없다. 저것은 오로지 결과만 있고 서사는 없는 껍데기다. 저것은 그냥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숫자의 집합이다. 저것은 수많은 픽셀에 그려진 도트다.


서사가 없으니 감정도 없다. 경이로운 것인지 기괴한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이미지를 보고 유일하게 느껴지는 건 오로지 비인간성뿐, 그 어떤 감정도 울림도 없다. 저것들에 결코 예술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순수 욕망과 이상 또는 희망 같은 것들, 그것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대한 단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던가? AI에게 비인간성이 붙어있는 한 만들어낸 이미지가 아무리 뛰어나도 예술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최강야구에 니퍼트가 나왔으니 의미가 있지, 아무런 외국인 투수나 데려온다고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2. 모자를 푹 눌러쓰는 것에 대한 짧은 생각

"자르반 84세, 이 모자는 좀 특별해 보인다"

모자는 모자다. 딱히 특별할 게 없다. 머리에 쓰는 옷가지는 모두 모자다. 나 역시 오늘 퇴근 후 운동용 모자를 썼고, 지금은 외출용 모자를 쓰고 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순수 기능으로서의 모자라기보다는 패션으로서의 모자다. 격한 움직임을 동반하는 야외활동을 위해 쓰는 모자 말고.


언젠가부터 거리에는 환절기나 미세먼지가 많은 날이 아님에도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처럼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런 사람들을 보며 개인의 취향이겠거니 하며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가슴 한편으로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니는 게 꼴 보기 싫다는 생각에 문득 나의 심리상태가 궁금했다. 대체 왜 나는 사람들이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니는 꼴을 못마땅하게 느낄까?


모자를 쓰는 이유는 가지각색이다. 머리를 감지 않아서. 가리고 싶어서. 햇빛을 피하고 싶어서. 패션이라서 등. 개인으로 따지면 수많은 이유가 있을 터니 모자를 쓰는 이유에 대해서는 논할 필요가 없겠다. 필요하면 쓰는 게 맞다. 모자의 기능적 측면은 범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핀트는 기능이 아니라 기능 이외의 것이 될 것이다. 모자를 푹 깊게 눌러쓰는 것에 포커스를 맞춰보자. 모자를 푹 눌러쓰는 이유는 패션의 목적이 있겠지만, 더 근원적인 이유에는 상대를 교란시키려는 목적이 있다. 모자를 쓰고 있는 첫인상을 상대에게 보임으로써 자신은 꾸미지 않았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알릴 수 있다. 그로써 상대에게는 자신이 꾸밈으로써 외형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는 여지를 남길 수 있게 된다. 만약 실제 꾸몄을 때는 현재의 모습보다는 거의 대부분 더 아름답고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바로 그 가능성 말이다.


이것은 마치 최고의 성형은 다이어트라는 말에 담긴 속뜻과 같다. 자신에 대한 평가를 현재에 두지 않고, 미래에 둘 수 있다는 것. 다른 표현으로는 자기 방어적 행동이자 상대를 속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그런데 이런 목적이 의도했건 안 했건 상대에게 그리 기분이 나쁠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이것도 범인이 아닌 모양이다. 대체 어떤 포인트에서 모자를 눌러쓰고 다니는 게 기분이 나빴던 걸까?


"원피스 보아 핸콕, 무한 멸시 포즈"

두 명의 인물이 있었다. 정면에서 보기에 코 끝이 보이지 않을 수준으로 파란색 볼캡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니던 그녀. 그리고 패션이랍시고 후줄근한 회색 추리닝 바지에 눈이 보이지 않는 검은색 벙거지 모자를 쓰고 다니던 그놈. 그녀와 그놈을 만날 때면 그들이 내게 하던 특별한 행동이 하나 있었다. 그들은 상대를 확인할 때마다 고개를 쳐들면서 깔아 내린 눈깔로 상대를 쳐다봤다. 그 상대에는 앞자리 앉은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화를 하면서도 그 같은 행동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당연했다. 그렇게 눌러썼으니 앞이 보일리 만무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모자를 푹 눌러쓰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유발되는 바로 이 행동이 매우 거슬렸던 것이다. 상대를 내리 깔아보는 것. 상대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은 기본적으로 아주 무례한 일이다. 자신의 힘이나 권력을 과시하려는 심리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건 개인적인 느낌이기도 하지만, 심리학적으로도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다. 상대를 동등한 위치에 놓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보다 우위를 차지하려는 그 심리적 불편함이 바로 모자를 푹 눌러쓰는 행위로부터 나왔던 것이다.


내가 불편함을 느꼈다면, 필시 누군가도 불편함을 느낄 터. 무대 위 같은 특별한 목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니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화를 하는데 굳이 불편함을 유별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사람을 앞에 두고 굳이 깔아 보지 말고. 모자를 벗든지.

작가의 이전글 중국의 세계 지배를 위한 명분일까, 아니면 실리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