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 이민진
※ 지금은 너무나도 유명한 작가 이민진 님의 책 <파친코>입니다. APPLE TV 오리지널 시리즈 드라마 파친코의 원작이자 일제강점기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이민자 이야기가 담긴 책입니다. 정말 재밌습니다.
왜 에쓰코네 가족은 파친코 사업을 그리 안 좋게 생각할까? 외판원이었던 에쓰코의 아버지는 형편이 안 되는 외로운 주부들에게 비싼 생명보험을 들게 했고, 모자수는 성인 남녀들이 돈을 따려고 핀볼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들은 모두 가능성과 두려움, 외로움을 이용해 돈을 벌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행운아일 거라는 희망을 품고 게임을 계속했다. 어떻게 성공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겠는가. 파친코는 바보 같은 게임이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았다.
- 본문 중에서
작가 이민진
전 세계에서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경계인으로서의 날카로운 시선과 공감을 바탕으로 한 통찰력으로 복잡다단한 역사와 인간의 본질을 포착하며 '제인 오스턴, 조지 엘리엇을 잇는 작가'라는 찬사 속에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했다.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난 작가는 일곱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예일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후 조지타운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일했으나, 건강 문제로 그만두게 되면서 오랜 꿈이었던 글쓰기를 시작했다. 2004년부터 단편소설들을 발표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2008년 미국 이민자의 이야기를 담은 첫 장편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으로 작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두 번째 장편소설 <파친코>는 작가가 역사학과 학생이었던 1989년에 '자이니치'라 불리는 재일조선인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결심한 후 2017년 출간되기까지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집필한 대작이다. 일본계 미국인인 남편과 함께 4년간 일본에 머물며 방대하고 치밀한 조사와 취재 끝에 이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회사 옆 부서에서 자재 관리 업무를 담당하는 김대리님과 경남 창원으로 출장 갔을 때의 일이다. 구미에서 두 시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에 있는 창원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는 이야기 꽃이 한창이었다. "그런데, 김대리님 고향은 어디예요?" "어... 창원입니다." "네? 정말요?" 누구 하나 의도했던 상황은 아니었지만, 고향에 고향사람을 데리고 간다는 건 이유 모를 뿌듯함이 느껴지는 일이었다. 나는 이어서 물었다. "그러면 김대리님은 여기 들어오시기 전에 무슨 일을 하셨었어요?" "어..." 순간 나는 아차 싶었다. "아이고, 불편하면 말씀 안 하셔도 돼요. 정말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다른 이야기할까요?" 그때 김대리님이 말했다. "저 사실은 과거에 딜러 생활을 좀 했습니다." "예?!"
보조석에 앉아 오늘의 디제이를 담당하던 우리 부서 직원 이대리님과 나는 벙찐 얼굴로 서로를 마주 봤다. 태어나서 같이 일해볼 거라고는 상상해 볼 수 없었던 직업 중에 하나이지 않았을까. 세상에 딜러라니. 나는 혹시나 싶어서 재차 물었다. "혹시, 롤이나 오버워치에서 딜러하셨다는 건 아니죠?" "하하. 그것도 하긴 하는데, 제가 강원랜드에서 4년 동안 딜러 일을 했었어요." 이 무슨. 어린 시절 동네에서 아저씨들이 집에 있는 아주머니 모르게 하우스에서 화투를 친다는 소문은 들어봤어도, 전문 딜러라니.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와 타짜 출신이셨네, 그동안 미안했습니다 김대리님. 살살 부탁해요."
장난 섞인 멘트가 오고 가는 사이 노래를 바꾼 이대리님이 문득 한 마디를 꺼냈다. "딜러라는 게, 카드 딜러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파친코장 관리를 하셨다는 거예요?" 파친코. 도박과 가까이 지내지 않는 이상 거의 쓰일 일이 없는 요상한 일본어를 듣는 게 얼마만인지. 내 생에 이런 유의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인가. 김대리님이 말했다. "저는 딜러를 3년 했고, 관리를 1년 했습니다. 근데, 그 기계를 직접 만지는 게 아니라 관리해 주시는 분들이 따로 있어요." "아, 우리랑 하는 일이 비슷하군요. 건설 관리를 하고 있지만, 실제 건설은 다른 분들이 하시는" "네네. 그쵸 그쵸." 영화 타짜를 좋아하던 내가 실제 딜러출신을 만나고, 파친코를 떠올리게 된 건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책 <파친코>가 한국계 출신의 작가가 쓴 한국인의 이야기이며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오래전의 일이었다. 마침 2022년에 한국어 번역본이 나온다고 하니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었고. 그런데, 한국어 번역본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놈의 호들갑 때문이었다. 선천적으로 나는 한 가지 이슈나 현상에 대해 호들갑 떠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마치 광신도처럼 그것을 찬양하거나 때로는 무차별적으로 깎아내리는 아주 편협한 사고의 집합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하지만 각종 언론 미디어와 SNS를 통한 홍보는 물론이거니와, 이미 미국을 넘어 세계를 제패했던 책이자 더군다나 한국인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라니. 이거야 말로 호들갑 덩어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국뽕에 취약한 한국인의 특성상 이 책의 인기가 엄청날 것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결국 이 책은 한 때 물량이 부족해 판매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팔려나갔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언급되기 시작했다. 한 다리 건너 들려오는 호평 세례 그리고 마치 거대한 파도의 물결처럼 거부할 수 없이 밀려오는 여러 담론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왜? 거대한 담론에 침식되기 싫어서다. 누구 하나 싫다는 말 없이 좋다는 이야기뿐이니, 만약 내가 책을 읽고 혹시나 좋지 않은 느낌을 받거나 혹여라도 여론에 물들지 않을까 우려스러웠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타인에게 물드는 걸 제일 싫어한다. 나는 오직 나로서만 존재할 뿐이니까. 그런데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오늘. 드라마로 만들어지면서 두 번째 인기를 두렸던 <파친코>의 거품이 사그라들 즈음이 되면서 나는 이제야 책을 읽을 용기가 생겼다. 아니, 정확하게는 용기보다는 열의가 생겼다. 읽고 싶다는 강력한 욕망. 바로 그것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 <파친코>는 스위스 장인이 만들어낸 명품 시계 같다. 아주 정교하고, 아주 치밀하고, 아주 섬세한. 어느 것 하나 맞물리지 않는 것 없이 정교하게 설계된 그대로 동작하는 시계처럼, 수백 수천 개의 부품들이 딱 맞물리듯 이야기가 흘러간다. 이민진 작가님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4년간 일본에 머무르며 인터뷰 등 조사를 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진 것이다. 무려 30년 세월의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그런 책을 말이다. 이것이 장인정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파친코>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주인공인 선자와 양진, 사건의 발단이 되는 두 남자 한수와 이삭, 그리고 그 사건의 결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선자의 두 아들 노아와 모자수가 있다. 벌써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파친코가 담고 있는 기본적인 컨셉은 '대립'이다. 위에 나열한 인물들은 가족관계로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으면서도 상호 간 대립한다. 어려서부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아이를 갖고, 그리 친절하지 못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선자. 이와 반대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아이를 가지지 못하고, 친절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양진. 한수와 이삭, 노아와 모자수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더 크게 보자면 시대적 상황에 따라 살아남기에 치중했던 1세대 인물과 생존이 목표가 되기보다는 변화하는 세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던 2세대 인물 사이의 이야기. 부모와 자식 간의 대립된 서사. 이민자의 이야기. 이것이 바로 파친코의 주된 서사다.
또한 이 책을 논하기에 구조적인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역사적 사건의 장대한 서사이면서 동시에 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한 인물들의 인생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승전결이 빠질 수 없을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어떤 이야기에도 기승전결은 빠지기 어렵다. 그런데, <파친코>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이야기가 철저하게 기승전결의 원리를 그대로 따랐으면서도, 그 내부에서는 일화라고 표현할 수 있는 큰 이야기 속 작은 이야기들을 때로는 과장되게, 때로는 한번 꼬기도 하고, 때로는 아주 편안하게 요리조리 잘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한 가족의 이야기를 보면서도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진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야기가 흘러감에 따라 감정이 적절하게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에 지루함을 느끼기가 어렵다. 한 가지 더 있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흔히들 말하는 떡밥을 회수한다고 하는 표현 즉, 복선이 되는 장치가 군데군데 숨겨져 있다. 그리고 작가는 그것을 아주 시원하게 털어낸다. 한 이야기가 끝날 무렵 혹시 그것이 복선이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했던 독자들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털어내니 작가가 풀어내는 방식에 매료되지 않기가 어렵다. 나는 이것이 작가가 의도한 교묘한 장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앞서 이 작품을 시계에 비유했다. 그렇다. 우리 세상은 YES or NO 일 뿐. 애매한 결과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또 한편 이 책이 재미있는 것은 완전히 같다고 볼 수는 없지만,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던 두 형제간에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는 데에 있다. 큰 형 노아는 사실상 자신의 정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것을 숨기면서 지내다가 종국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와 달리 동생인 모자수는 자신의 처지를 일찍이 받아들이고 일본 땅에서 이민자 한국인들이 많이 종사하던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결국 가족을 충분히 부양할 만큼의 부를 얻게 된다. 이는 작중 초반 캐릭터를 표현하는 어린 시절의 묘사에도 정확하게 잘 표현이 되어 있다. 형 노아는 학교에서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칭찬을 많이 받는 캐릭터로 자신의 존재를 일본의 시스템에 잘 녹이며 살아갔던 반면, 동생 모자수는 자신과 친구를 놀리는 일본인 학생들을 흠씬 두들겨 패며 때로는 반감을 서스름 없이 드러냈다. 그러니까, 모자수는 자신이 애초에 일본인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했거나 혹은 일본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고 보이는 것이다.
작중 후반의 이야기는 결국 이 두 인물 간의 대립되는 서사가 주된 내용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작가가 이것을 풀어내는 방식이 상당히 재미있다. 작가는 두 인물의 차이가 아주 선명하면서도 독자로써 두 인물이 가진 배경과 행동, 선택, 인물의 감정 같은 것들이 모두 충분히 공감 가능하도록 묘사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독자들은 한 가지 인물에게 매료되는 것이 아니라 두 인물 모두의 서사에 집중하게 되고 딱 한 가지를 선택하기 어려운 지점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느낄 수 있는 재미는 이야기가 주는 명쾌함보다는 결정하기 어려운 주제를 던져줌으로써 독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준다는 데에 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건 입을 즐겁게 하고, 멋지고 예쁜 걸 보는 건 눈을 즐겁게 한다. 그리고 생각할 거리가 있을 때 머리는 즐거워진다. 그리고 끝내 그것을 포기할 때 느껴지는 이름 모를 경외감. 이것은 분명 허탈함이 아니고 경외감이다. 이렇게 어려운 주제를 풀어쓴 작가에게 느껴지는 경외감인 것이다. 여기서 이 경외감 역시 재미의 한 요소가 된다. 사람들은 딱 한 가지로 정해진 결론보다는, 내릴 수 없는 결론에 더욱 매력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동안 아이언맨, 어벤저스 시리즈를 만든 마블코믹스의 작품들이 왜 인기가 있었을까? 단순히 적들을 두드려 패기만 해서일까? 아니, 그 안에 담긴 히어로들의 깊은 고뇌가 묻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두 형제의 대립되는 이야기에서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정체가 어떻든 결국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곧 현실을 살아라는 맥락으로도 볼 수 있는데, 자신의 과거가 어떻든 출신이 어떻든지 간에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과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고 소화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바뀌지 않는 것에 얽매이지 말고, 보이지 않는 신념 같은 것에 의미를 두지 말고, 눈앞에 있는 생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전부가 아닐까. 부모가 자식에게 그렇게 했듯 말이다. 소설에는 기독교의 체취가 진하게 묻어있는데, 인물들이 기도를 하고, 또 기도를 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기도를 할 시간에 차라리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다른 걸 하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두 번째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이다. 작중 배경으로 충분히 이해가 가면서도 한편으로 가슴이 답답했던 이유는 캐릭터들이 가지고 있는 막연한 믿음, 신념, 편견 같은 것들 때문이다. 인간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듯 작중 캐릭터들도 각자만의 고유한 신념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그런데 그 신념이 너무나도 굳세다. 한 번 들어선 신념이 바뀌는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렇다 보니, 캐릭터들의 서사가 일부 극명하게 나뉘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태풍에 불어오면 갈대는 살아남고 고목은 부러지기 때문이다. 머리가 좋아 공부도 잘하고 최고의 대학에 다니던 형은 돌고 돌아 결국 자신이 그토록 꺼려했던 파친코에 근무하게 된다. 형은 파친코가 야쿠자나 일본에 사는 이민자 한국인들이 주로 운영한다며 싫어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자신의 동생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야쿠자도 아니고, 그저 살아남기 위해 파친코일을 배웠고 결국 부를 얻게 된 동생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사람인가? 옳지 못한 사람인가? 결코 그건 아닐 것이다. 편견을 받아들이지 못한 형은 죽었고. 편견을 받아들인 동생은 살아남았다. 그것이 전부다.
세상에 주인공은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 없다. 세상은 결국 3인칭이 아니라 1인칭으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파친코>는 서로 다른 인물들에게 주어진 각기 다른 서사를 볼 때, 너무나도 훌륭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명이 주인공이 아니라, 등장하는 모두가 주인공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서로가 각자만의 깊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이기적이면서도 포용적인 것. 한 가지가 아니라 대립되는 두 가지가 양립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 선자와 양진. 한수와 이삭. 노아와 모자수. 결코 한 가지로 딱 떨어지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세상의 이치를 그리고 그 복잡함 속에서 진실로 뿜어져 나오는 인간적인 면모와 그들의 삶. 그것을 작가는 너무나도 잘 묘사한 것 같다. 하나부터 끝까지 도저히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없다. 쉽게 말해서 전혀 억지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변호사 출신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모든 상황에 세세한 근거와 명분을 필요로 하는, 반드시 그것을 캐치해야만 하는 작가의 직업적 면모가 자연적으로 녹아든 것이 아닐까 싶다. 책 <파친코>를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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