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이는 초록불을 보면 위협감을 느낀다.
횡단보도 앞 초록불이 깜빡인다. 발 빠른 사람들은 뛰어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그 모습을 관망하며, 나는 건널목의 볼라드 안쪽에 멈춰 서 있다. 마침 버스 몇 대가 건너편 정류장으로 다가간다. 내가 타려는 버스 7715도 그 뒤를 따른다. 한편 남은 시간을 알려주는 표시기의 램프가 바쁘게 줄고 있다. 세 칸에서 두 칸으로, 두 칸에서 한 칸으로. 초록불은 곧 빨간불로 바뀌었고 버스는 유유히 정류장에 닿았다. 서둘러 길을 건넌 사람들은 안도한 얼굴로 줄지어 버스에 오른다. ‘역시 뛰어야 했나?’ 잠시 안타까워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내 발은 횡단보도 앞에서 늘 무겁다. 깜빡이는 초록불을 보면 좀처럼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떠나가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아쉽게 바라보다가 스마트폰으로 교통정보를 확인해 본다. 다음 버스는 12분 뒤에 도착한단다. ‘어쩔 수 없지.’ 눈앞의 빨간불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외출할 때마다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빨간색 불은 경고한다. ‘그 자리에 멈추시오.’ 보행자도 운전자도 익숙하게 그 경고를 받아들인다. ‘빨간불에 멈추고, 초록불에 건너기’는 걸음마를 떼고 나서 가장 먼저 훈련하는 사회 규범 중 하나다. 가끔 보호자가 아이의 손을 잡고 빨간불에 횡단하는 경악스러운 일도 벌어지지만, 대개의 교양 있는 사회인들은 신호를 지킨다. 그것이 모두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일임을 배워서, 혹은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한데, 쫄보인 나는 초록불에 건너는 것조차 겁이 난다. 초록색은 대개 안전과 평화, 소통의 의미를 띠는 색이지만 깜빡이는 초록불을 보면 오히려 위협감을 느낀다. ‘아직은 초록불이니까 최대한 빨리 건너야겠다’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텐데 ‘망했다. 이제 곧 신호가 바뀔 거다’라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무심코 횡단보도를 건너다가도 점멸기에 대한 분노가 인다. ‘벌써부터 깜빡인다고? 대체 얼마나 빨리 건너라는 거야?’ 잔여 시간을 알려주는 신호등은 조금 낫지만 못마땅한 건 마찬가지다. 표시된 숫자 20은 ‘20초’가 아니다. 끽해야 12초 정도. (실제로 재보았다) 보행자의 안전을 담보로 한 규칙은 이토록 무정하다.
어떤 보행자들은 횡단보도의 신호가 아닌 차량 신호를 본다. 대국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차량 신호가 노란색으로 변하고 차들이 멈추기 시작하면 미리 건널 태세를 갖춘다. 그들은 규칙과 인간을 굳건히 신뢰한다. 오토바이나 자동차들이 멈춰야 할 때 반드시 멈추리라 생각한다.
보행신호가 빨간불일 때 건너기 시작하는 그들의 안전불감증이 때로는 부럽기도 하다. 내게 벌어질 수 있는 온갖 사고를 상상하며 하루를 보내는 나는 분명 그들보다 안전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매 순간 긴장하고 불안해하며 길을 걷는다. 내 앞의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나를 해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런 내가 교통 신호만 믿고 도로(횡단보도 역시 도로다)에 선뜻 발을 들일 수 있을 리 없다.
한편으로는 지기 싫은 마음도 있다. 튼튼한 다리로 빠르게 걸을 수 있고, 급하면 힘껏 달릴 수 있지만 횡단보도만큼은 바쁘게 뛰어서 건너고 싶지 않다. 보행로에서도 자전거나 오토바이, 전동스쿠터까지 수많은 바퀴들에게 길을 내어주고 있는 마당에 횡단보도에서조차 걷는 사람이 걷기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자니 배알이 꼴리는 것이다.
신호등의 점멸 간격은 일대의 교통사정에 따라 다르다. 어떤 횡단보도는 여유 있게 건너는 반면, 어떤 곳은 아주 빠른 걸음으로 건너야 한다. 어떤 노인들은 ‘다리가 아파서’ 무단횡단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같은 신호에 이동하더라도, 몸이 불편해 걸음이 느린 이들은 초록불이 빨간불로 바뀐 다음에야 건너편에 다다른다. 보행자에게 주어진 것은 고작 그 정도의 시간이다. 나는 그 깜빡이는 신호가, 그 사이에 건너지 못하는 사람은 없는 셈 치겠다는 으름장으로 여겨져 불쾌하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마저 일종의 투쟁으로 받아들이고 배려가 부족한 시스템에 분노하는 스스로가 좀 딱하기는 하다. 반골도 적당한 반골이어야지. 정작 누려야 할 권리(초록불) 앞에서는 안절부절못하고, 행동을 금지하는 규범(빨간불) 앞에 마음 놓고 순응하는 꼴이 우습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도 타고난 천성이다.
아무래도 빨간불이 싫지 않은 이유는, 초록불을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 신호가 바뀔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누를 수 있다. 빨간불은 가만히 멈추어 있는 상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요즘은 보도블록의 일부를 신호기로 바꾼 횡단보도가 꽤 있는데,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아래로 향해 있는 것을 감안하여 점멸하는 신호를 바닥에 설치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신호등 앞에서만은 스마트폰을 보지 않고 고집스럽게 정면을 바라본다. 빨간 램프 속 사람처럼 의젓하게 초록불을 기다린다. 빨간불은 깜빡이지 않기에 확실하고 온전하다. ‘정지’, ‘위험’, ‘경고’, ‘금지’. 빨간색이 내포하고 있는 부정적 신호에는 고민이나 오해의 여지가 없다. 누구든 빨간불 앞에서는 멈춰야 한다. 그 고정된 규범 앞에서 나는 잠시 긴장을 늦추고 편안해진다.
기다림 끝에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면 다가오는 오토바이가 없는지, 차가 모두 정차했는지 살펴본 뒤 발을 움직인다. 다리에 깁스를 한 사람이나 짐을 끄는 사람, 노약자가 눈에 띄면 한 발짝 뒤에서 느리게 걷는다. 신호등은 걸음이 느린 사람을 기다려주는 일이 없지만 얼굴에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기다릴 수밖에 없다. 차창을 열고 빨리 건너라고 소리 지르는 운전자는 (운 좋게도) 아직까지 마주친 적이 없다. 만약 그랬더라면 나는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며 때가 되어 터지는 폭탄처럼 폭발해 버렸을 것이다.
그런 모든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과 사고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다음 건널목의 신호에 멈춘다. 빨간불을 응시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될 초록불을 기다린다. 그리고는 꼬리물기를 하는 차량들과 빈틈을 급습하는 오토바이에 낱낱이 흠칫거리며 습관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역시 이불 밖은 위험한 것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