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도 잊기 힘든 사람일 것이다
전화는 타인과 연결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의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으면, 굳이 메일주소나 SNS 아이디를 알아낼 필요가 없다. 우리는 휴대전화를 열어 손가락을 몇 번 터치하는 것만으로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전화가 연결되지 않아도 우리가 연락했다는 증거는 남는다.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이었는지 알림 창의 숫자가 말해주며, 전화를 건 번호도 남는다. 전화가 연결되어 있는 동안 우리는 기지국을 거쳐오는 목소리의 시간차를 느끼지 못한다. 이제는 영상 통화도 즉문즉답이 가능한 시대. 실제로 만나 얼굴을 보는 것을 제외하면 전화는 서로의 존재에 시간차 없이 가 닿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런 이유로, 항상 전화가 두려웠다.
나는 대화를 나눌 때 시간차가 필요한 사람이다. 즉문즉답이 부담스럽고, 내 말투와 목소리가 적절한 지 신경 쓰인다. 내 대답을 듣는 상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어 두렵다. 차라리 만나기로 약속을 정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쪽이 전화보다 안전하게 느껴진다. 이런 사람에게 전화번호란 과연 어떤 의미일까.
휴대전화에 가나다순으로 나열된 전화번호부를 내려다본다. 한때 이곳에 등록된 개인 전화번호는 6백 개가 훌쩍 넘었다. 방송일을 하는 사람에게 연락처는 곧 자산이라던 어느 PD의 조언처럼 나는 착실하게 번호를 모았다. 수집하기 어려운 번호는 많지 않았다. 국회의원의 번호도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는 세상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화번호부를 볼 때마다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세상과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그럴듯한 착각을 하기에 알맞은 전리품이었다.
4년 차에 이직을 하며 방송일을 그만뒀다. 내가 가진 번호들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전화번호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6백 여 개의 번호 중에서 기억하는 이름도 점점 줄어갔다. 전화기를 바꿀 때마다 정리되지 않은 전화번호부를 들여다보았다. 연락하지 않을 사람들의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매일 같이 통화하던 시민단체 활동가의 이름, 원고를 주고받던 신문기자의 이름, 정치인이 되고 싶어 방송가를 기웃거리던 변호사의 이름, 촬영 때문에 여러 번 같은 방을 썼던 리포터의 이름, 술에 취하면 첫사랑 얘기를 하고 싶어 하던 중년 감독의 이름(그 얘기는 끝까지 못 들었다), 방송이 아닐 때도 김-빱을 김-밥이라고 발음하던 아나운서의 이름, 그밖에 인터뷰에 응하거나 응하지 않았던 공직자나 학자들의 이름도. 웬만해서는 나를 기억하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이름들을 지우지 않았다. 단순히 전화번호가 줄어드는 게 싫었다. 나와 무관한 세상이라도 연결되어 있다는 착각을 이어가고 싶었다.
정작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은 수많은 번호 속에 숨겨졌다. 목록을 살피다가 어떤 이름이 눈에 어리면 빠르게 스크롤을 내렸다. 가끔은 그리움을 숨기기 위해 그립지 않은 이들의 번호가 필요했다. 전화가 울려도 받지 않을 거면서 그립다고 생각하는 것은 습관적인 망상이었다. 아주 오래되고 비겁한, 자기만족의 습관.
더 솔직하게 말해볼까.
나는 과거의 나를 아는 사람들과 다시 연결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을 생각하면 지난날의 과오가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서툴고, 나약하고, 거짓으로 위장한 10대, 20대의 모호연을 영영 지우고 싶었다. 내 기억과 달리 나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 좋은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나’는 아니라고 믿었다. 다른 사람이 기억하는 모호연을 알고 싶지 않았다. 완벽하게 단절할 수 없는, 정체를 모르는 내가 거기 있었다.
가끔은 아주 달콤한 꿈을 꾸었다. 그리운 이름들이 또렷한 얼굴을 하고서 나에게 말을 거는 꿈. 뇌 속에 보존된 기억은 어제 것처럼 신선하다. 어쩜, 목소리도 그대로다. 꿈에서 깨면 다 사라지고 마는데, 이 허망한 것을 과연 그리움이라 말해도 좋을까? 받지 않을 전화번호를 남겨두고 가만히 곱씹는 것을? 목록에도 없는 이름들을 마음속으로 가만히 불러보는 일을?
사실 나는 너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다만 잊히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움이 아니다.
기억 속의 네가 언제나 반갑고 아름다울 뿐이다.
‘나’와 ‘너’를 더한 것이 ‘우리’라고 할 때, ‘우리’에서 ‘나’를 빼면 무엇이 남을 것 같은가? 거기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우리가 만든 추억은 나만의 것도, 너만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관계 속에서 우리는 숫자를 더하고 빼는 것처럼 말끔하게 나눌 수 없는 연속적인 존재다. 개념이 아닌 현실의 무지개색을 몇 가지로 분절해서 표현하기 어려운 것처럼, 추억이란 그런 것이다. 나를 빼고는 제대로 너를 추억할 수 없다.
어쩌면 나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는.
어쩌면 나도 잊기 힘든 사람일 것이다. 어떤 의미로든, 내 의지와 상관없이.
3년 전, 단말기를 바꾸면서 비로소 전화번호부를 정리했다. 지난 10년 동안 연락하지 않은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하나하나 더듬어가며 지웠다. 전화를 받고 싶지 않은 번호들을 남겼고(실수로 받을까 봐), 내가 다니는 병원들과 가끔 연락 받는 공기관, 시민단체의 번호를 저장했다. 그리고 오늘, 기억하지 못하는 나머지 이름들과 이미 지웠어야 마땅한 사람들의 번호를 지웠다. 그들이 나라는 사람에게 기대했을 개인정보 보유 기간도 한참 지났을 테니까. 이제 나의 전화번호부에 남은 건 내가 살아가는 데 의지가 되는 이름들, 언젠가는 꼭 연락하리라 다짐한 은인들, 생업을 매개로 나눈 연락처들이다.
세상과 치밀하게 연결되지 않은 나는 때로 부유한다. 끈이 떨어진 부표와 같이,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증명하지 못하는 채로. 하지만 여기가 어디인지 꼭 알 필요가 있을까. 가야 할 곳을 매 순간 정하지도 못하는데. 그냥 되는대로 떠도는 것이 나쁜가. 정박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라는 걸, 오랜 강박과 불안 속에서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어떤 기억은 마음속 풍경으로 남겨둔다. 너와 내가 공유했던 기쁨과 슬픔, 명장면과 노랫말, 때로는 설레고 때로는 스릴 넘쳤던 모험과 장난의 내러티브. 그 우정의 순간들을 강박적으로, 번호라는 실존의 형태로 남겨둘 필요는 없다. 아마도 나는 너를 기억할 것이다. 이미 10년, 20년이 지난 것처럼 그만한 세월이 다시 흘러도 꿈에서 너를 보게 될 것이다. 내게 저장된 풍경 어딘가에서 여전히 반짝이는 모습으로.
나는 운명론자니까 일단은 여지를 남겨둘까. 혹시 인연이 닿아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시간차 없이 두려운 마음 그대로 대화를 나누어도 괜찮겠다. 그것이 과거로부터 한참 나아가 새로운 ‘우리’가 될 수 있다면, 나는 더 이상 나를 부끄러워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때 네가 만나는 나는, 분명히 너만큼 나를 사랑하고 있을 테니까. 오늘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