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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호연 Aug 07. 2023

우선은 실패자가 되기로 했다


스물일곱의 모호연은 자신이 실패작이라고 생각했다. 학업이며 직업이며 재력이며 어느 하나 만족스러운 데가 없었지만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타인과 관계를 맺는 데 모조리 실패했다는 사실이었다. 정기적으로 연락하거나 만나는 친구가 없고, 장거리 연애를 하는 연인이 있었으나 신뢰를 잃은 지 오래여서 언제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피를 나눈 가족이라고 나은 것은 없었다. 폭력적인 아버지의 집권 아래 나머지 가족들은 서로의 고통을 외면하느라 늘 데면데면했다. 모호연은 고립되어 있었다. 어느 날의 일기에는 이렇게 썼다. 


‘나는 행복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패를 통해 성장한다. 새로운 기회를 갈망하고 다음에는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희망을 품기도 한다. 실패자에게는 미래가 있고 개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자칭 ‘실패작’들은 다르게 생각한다. 자신의 어딘가가 근본부터 잘못되었다는 좌절감에 빠져있다. 제조 과정에서 부품이 빠진 전자기기처럼 타고나기를 잘못 타고났다고, 모호연은 생각했다.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 반드시 민폐를 끼치거나 안 좋은 선택을 반복하고 마침내 관계를 망치게 되리라 단정했다. 그런 자포자기의 상태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건 불가능하다.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모호연이 경험한 행복은 언제나 타인과의 관계에 있었다. 혼자서는 절대로 행복할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고립을 결심한 것은 자신을 믿을 수 없어서였다. 타인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나는 반드시 혼자여야만 했다. 


마흔이 넘은 지금,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저 딱하다. 필요 이상으로 자기를 혐오하고 연민하느라 소중한 인연들을 하나 둘 잃어갔으니. 그러나 자업자득이라며 비웃고 말기에는 불편한 마음이 있다. 모호연의 모든 사정을 헤아리고 편을 들어줄 사람은 결국 나뿐이니까. 


스물일곱 모호연의 입장에서 변명하자면, ‘실패작’이라는 생각에는 어느 정도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었다. 모호연의 아버지는 폭력범에 사기꾼에 강간범이었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하는 데 죄책감이 없고, 강한 자에 빌붙어 아첨하거나 선량한 약자를 착취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법전을 끼고 살며 타인에게 고소를 남발하지만 정작 자신은 처벌을 받은 적은 없는, 갱생이 어려운 악인이다. 그런 악인과 수십 년간 그럭저럭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다는 것이 자기혐오의 시발점이 되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버지를 이해했고 - 그것이 동의나 수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 아버지와 닮은 구석이 있다고 느낄 때마다 모호연은 자신이 괴물 같다고 여겼다. 악인을 방관하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악인을 빼닮은 얼굴이 끔찍해 오랫동안 거울을 보지 못했다. 어린 모호연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자아를 분리해내지 못했다. 때문에 가정폭력의 피해자이면서도 자신의 피해자성을 인정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변명은 여기까지하고, 냉정하게 말하면 자신을 ‘실패작’이라고 낙인찍는 것은 사교 관계에 일절 도움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 ‘낙인찍기’는 겉멋 들린 자기 보신 행위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네가 이해해.’라는 방만한 태도를 정당화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서둘러 자책하며 사과를 남발하고는, 상대방의 동정심을 이용해 용서를 갈취하는 습성이 있다. 다정한 이들은 열심히 그를 위로한다. ‘네가 어떤 사람이든 괜찮아. 나는 너를 존중해.’ 그들은 ‘실패작’에게 없는 자존감을 북돋워주려고 애를 쓴다. 안타깝게도 올바른 해법은 아니다. 영화 <부당거래>의 명대사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은 과연 실패작들을 위한 말이다. 그들은 타인의 다정을 소모함으로써 정서적 만족을 채우고, 소모된 사람들은 말없이(지적하면 골치 아파지니까) 곁을 떠난다. 다정한 이들은 떠나면서도 종종 자책한다. 내가 속이 좁았나, 조금만 더 버텼다면 관계가 달라졌을까, 하고. 그러나 고뇌 끝에 맞이한 이별은 생각보다 너무 쉽다. 그래서 다시 한번 상처받는다. 실패작들은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자칭 실패작’들은 실패를 끔찍하게 두려워하는 나머지, 자신이 실패한다면 그것은 노력이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환경과 조건을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상대가 수용하기만을 고대하다가 그것이 불가능하면 자기 연민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다. 





셜록 : 난 친구 같은 거 없어. 

존 : 그래. 왜인지 몰라?

-BBC 드라마 <셜록> 중에서 




드라마에서 ‘난 친구 같은 거 없어.’라고 진저리 치듯이 말하는 셜록의 얼굴은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굴욕짤*로 유명하다. 아무래도 사람은 거짓말을 하거나 경멸할 때 가장 추한 얼굴이 되는 것 같다. (그만큼 배우의 연기가 실감 났다는 의미) 셜록은 타인의 호의를 잘 감지하지 못한다. 일생 동안 오만한 괴짜 취급을 받아왔고(물론, 그가 오만한 괴짜인 건 사실이다) 그 자신도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거나 존중해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드라마의 서사가 진행될수록 시청자는 알게 된다. 타의 추종을 불가하는 천재, 별세계 사람 같은 셜록 또한 그를 보살피는 동료와 친구 없이는 인생에 닥치는 고난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친구 같은 거 없어’라는 대사는 일종의 방어기제일 뿐, 진실이 아님을 시청자는 안다. 눈앞의 존이 그의 유일무이한 친구이고, 그의 존재는 셜록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나는 친구 없어’ 따위의 말을 면전에서 듣고 나서 존은 화가 치밀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일방적으로 친구 관계를 부정당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셜록의 후회는 예정되어 있다. 앞으로 그의 처신에 따라 존은 친구로 남아줄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안하무인인 셜록이 놀랍게도 ‘가는 사람을 붙잡는’다. 셜록이 건넨 사과의 말들은 부적절하고 재수 없지만 존은 그의 ‘잡으려는’ 노력을 높이 산다. 모험가인 존은 자신이 셜록의 유일한 이해자라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 그래서 꾸준히 그의 인생에 끼어들고 참견하면서 셜록의 영역 안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간다. 


드라마는 허구의 산물이지만 이야기속의 인간은 철저하게 현실을 반영한다. 인물의 성장 서사는 그래서 대중적인 공감과 감동을 자아낸다. 인격이란 결코 절대불변의 성질이 아니다. 곱슬머리나 눈동자색처럼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형질과는 다르다. 일부분 타고난 천성이야 있겠지만, 인격을 형성하는 대부분은 경험이나 환경에 따라 끊임 없이 변화하고 구축된다. 실패작이라는 낙인을 지우는 치료법은 하나다. 질릴 만큼 혼자 있어 보는 것. 지나온 관계를 돌아보며 내가 했던 말과 행동,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짜맞추어 보는 것. 실패를 복기하다 보면 수오지심과 메타인지가 발달하면서 어쩔 수 없이 각종 이불킥 에피소드가 생성된다. ‘그때 거기서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런 부끄러운 행동을 하다니, 죽고 싶다.’ 후회스러운 과거를 들여다보는 일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필수 과제이다. 그러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나의 잘잘못을 그대로 마주하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과거의 나는 학업이며 직업이며 재력이며 만족스러운 데는 없었지만 친구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고 음식을 나누어 먹고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산책하는 즐거움을 알았다. 그래서 다시금 사람을 그리워했고 누군가와 다시 연결되기를, 진실한 우정을 갈망했다. 부재야말로 무엇보다 확실한 존재의 증명인 셈이다.**  


우정에 대한 사유와 글쓰기는 나의 멋지고 사려 깊은 친구들을 자랑하고 싶다는 욕구에서 출발했지만, 막상 백지 앞에 앉아 보니 쓰디쓴 반성부터 하게 됐다. 다소 민망하지만, 일련의 반성은 내면의 수치심을 감추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특별취급을 바라던 ‘실패작’ 모호연은 낙인을 지우고 평범한 ‘실패자’가 되기로 했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타인과 연결되는 마법을 믿어 보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어떤 사람이 되면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질문을 안고 친구들에게 손을 내민다. 우리는 친구를 사귐으로써 자기의 영역을 확장하고 한계를 극복할 기회를 얻는다. 우정이라는 이름의 사랑은 변화를 사랑하며, 언제나 우리 곁에서 관심과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 흙 속에 숨어있는 씨앗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서. 그 씨앗은 자라 무엇이 될까. 미래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그것이 궁금해서, 오래도록 친구들 곁에 머물고 싶어졌다. 


우선은 실패자가 되자.

나머지는, 우정이라는 이름의 사랑이 해결할 것이다. 







*이 포즈가 거북목을 예방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SNS에 ‘난 친구 같은 거 없어 포즈로 스트레칭했다’는 간증글들이 올라오기도 했다. 생각난 김에 턱을 최대한 당기고 어깨를 펴보자. 다만 누구든지 놀라서 달아날 만큼 못생긴 얼굴이 되므로, 이 스트레칭은 남들이 못 보는 때에만 하자. 


**황경신 에세이 <생각이 나서> 中

“누군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 보면 누군가를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있다와 없다는 공생한다.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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