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지프킴 Nov 08. 2021

[끄적 한 끼] 1. 당신은 세력에 의지하는가

숫타니파타, 한나 아렌트, "로집불조" 로 보는 인간의 민낯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Politics>에서 한 말이긴 하지만, 이 정도 명제는 일반인도 경험적으로 쉽게 알 수 있다.

인간은 각자에게 할당된 무인도에서 혼자 따로따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군락과 집단과 사회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사회를 이루고 살 수 밖에 없을까. 


내 삶을 관통하는 평생의 화두들 중의 하나이자, 

가장 큰 테마는 바로 개인과 집단 사이의 관계이다.

"개인과 집단"

이 한 가지 주제로도 파생되고 연상되는 여러 대립항이 정말 많다.

개성과 획일. 카오스(불확실함)와 코스모스(질서). 고독과 안정. 자유와 빵. 주인과 노예. 불교와 기독교. 자유주의와 전체주의.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세력에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동시에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취향과 자유를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다.

어떤 이는 그저 세력에 자기자신을 바치거나 기대어 이익을 도모하는 반면,

또 어떤 이는 이 우주에서 대체 불가한 자기 자신을 소중하다고 생각하며 위에 두고 그 세력을 아래에 둔다.


어느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나, 이는 경계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연스러운' 것 다시 말해 우리 DNA 안에 박혀 있는 것을 지성을 통해 의식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짐승과 다른 점이 없게 될 것이다. 


고급 외제차를 타고 싶은 마음, 서울대와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 강남에서 살고 싶은 마음.

그런 집단에 속해 있음으로 인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단계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개인은 자신이 속한 집단만으로 다 표현될 수, 기술될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습관과 생각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하게도) 각자가 결정하고 옮긴 행동이 다 다른 사람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한 행동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 스스로 나 자신이기를 저버리지 말자. 세력에 의지하려는 마음을 늘 경계하자.

때론 자유를 위해 빵을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1. 숫타니파타


오해가 있을까봐 미리 말하건대 나는 종교가 없다. 

인격신은 인간의 발명품이라고 생각하고, 다만 인간 내면에 신성(神性)이 있다고 믿는다.  

불경 가운데 가장 먼저 지어졌다는 숫타니파타. 

석가모니의 지혜와 육성이 오롯이 담겨 있는 글이다.  

여기에 그 일부를 소개한다.


눈을 조심하여
남의 잘못을 보지말고
맑고 아름다운 것만을 보라

입을 조심하여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고
착한 말 바른 말 고운 말만 하라

나쁜 친구를 사귀지 말고
어질고 착한 이를 가까이 하라

어른을 공경하고
덕 있는 이를 가까이 하라

지혜로운 이를 따르고
남을 너그럽게 용서하라

오는 것을 거절말고
가는 것을 잡지 말라

자신에게 잘해줄 것을 바라지 말고
지나간 일을 원망하지 말라

남을 해치면
그것이 자기에게 돌아오고
세력에 의지하면
도리어 화가 따르는 법이다

-숫타니파타-




가장 마지막을 주목하자.

"세력에 의지하면 도리어 화가 따르는 법이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어 성불(成佛)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여기에서 깨달음이란 각자 자기 자신안에 있는 것이지, 집단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것에 의지하지 않는다. 스스로 답을 찾는다.


왜 마지막에 '세력에 의지하지 말라'는 이런 경고성 문구를 넣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남들에게 동조할 때에는 내 안의 일부만 따라간다. 끄덕끄덕하며 동의하는 부분이 있지만, 아 이거는 별론데 하며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들도 있다. 

같은 의미로 내 안의 일부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세력을 끌어들였다는 것은 그 세력이 품고있는 부작용도 함께 온다는 뜻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까지도 함께 온다는 의미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대개 좋은 것이기 힘들다. 파국이다. 화를 입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주의! '아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것은 바로 자신이다.

나의 부족한 점을 안에서부터 채우는 사람이 되자. 바깥에서 들여오려고 하지 말자.

잠깐동안 세력을 이용해 이익을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내 더 큰 화가 나를 덮칠 것이다.






2. 한나 아렌트와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는 독일 태생의 유대계 정치이론가이다. 2차 대전의 세월을 정통으로 겪으면서 전체주의에 대해 평생을 연구하고 저술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등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다.


세력에 의지하려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은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전체주의란 공동체,국가,집단을 개인보다도 우위에 두고, 개인을 전체의 존립과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사상이라는 점에서 개인을 억압한다.


1964년 11월에 독일의 TV 프로그램에서 나눈 인터뷰에서 그는 전범인 아이히만과 나치 독일에서 일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관찰한 내용을 말한다.

이 중 한 구절을 소개한다.


"내가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남들에게 동조하는 것 - 많은 사람이 함께 행동하는 데 끼고 싶어 하는 것- 이 권력Power을 낳는다는 거예요. 혼자 있을 때는 당신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늘 무력해요. 함께 행동하는 데서 유발되는 이런 권력의 느낌은 그 자체로는 절대로 그릇된 게 아니에요. 그건 인간이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이에요. 그렇다고 선한 감정도 아니에요. 그냥 중립적인 감정이에요.
  (...중략...) 
기능하기functioning는 정말로 변태적인 행위 양식이고, 이런 기능하기에는 항상 쾌감이 따른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그렇지만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남들과 함께 행동하기, 즉 함께 상황을 논의하기, 어떤 의사결정에 도달하기, 책임을 받아들이기,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사유하기 등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기능하기에서는 제거돼요. 당신이 거기서 얻는 것은 그저 관성대로 굴러가는 것freewheeling일 뿐이죠. 이런 단순한 기능에서 얻는 쾌감이, 이런 쾌감이 아이히만에게서 꽤나 눈에 잘 띄었어요. 그가 권력에서 특별한 쾌감을 얻었느냐고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전형적인 공무원이에요. 그런데 공무원은 공무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일 때 정말이지 대단히 위험한 존재에요."

       -  <한나 아렌트의 말> p.76~77 , 마음산책



남들이 모두 Yes!(예) 라고 말할 때 나 혼자 No!(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대세가 모두 동조하는 것으로 정해진 상황에서 남들에게 동조하지 않을 수 있는 자들은 분명 소수다.

세력 안에서 생각은 하나가 되고, 그것과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그가 말한 '악의 평범성' 의 본질이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데에 있'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아이히만이 저지른 악(惡)의 기저에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흔히들 생각하듯이 악의 평범성을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이 있다. 그럴만큼 흔하게 발견된다'로 읽는 것은 오독(誤讀)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악은 상상력과 이런 식으로 연결돼 있다. 상상력과 자유를 가능하게 하자. 

세력에 의지해서 세력 바깥을 상상하는 일을 저버리는 것이 악의 근원일 수 있음을 기억하자.






3. 내로남불?  로집불조!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남과 나에게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인간의 위선적인 면모를 가리키는 현대판 사자성어다.

 


인간의 위선은 비단 이런 순간에만 나타나지 않는다.

위에서 소개했던 한나 아렌트의 인터뷰 중간에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 ...(전략) 동조했던 사람들은 늘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옹호했어요. 그들은 늘 말했죠. '우리는 상황이 더는 악화되지 않도록 계속 그 상태에 머물렀을 뿐입니다.' 맞죠? 하지만 이런 옹호는 철저히 거부되어야 마땅해요. 상황이 그보다 더 악화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중략)... 
그는 샤흐트와 파펜을 언급하면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들에게서 어째서 그리도 오랫동안 (나치에) 동조했는지 물으면 이들은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막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일이 어찌 그리 악화되었느냐고 물으면 이들은 자기에게는 아무 힘도 없었노라고 말합니다.' 이 지점에서 모든 논리가 정말로 허물어져버리고, 그들이 제출한 옹호서는 단순한 변명이 돼버립니다."

      - <한나 아렌트의 말> p.94, 마음산책


집단에 기대어서는 그 힘을 이용하고,

뒷문을 빠져나올 때에는 그 집단의 n분의1 이었을 뿐이었다고 자처하며 

책임, 죄의식을 덜어내려는 위선.


한 마디로 요약하면, "로집불조"다.

*로집불조 : 로맨스는 집단의 힘에 기대어 하고 싶고, 불륜으로 드러났을 때에는 일개 조직원일 뿐이라 말하기.


발음이 어색하다면 '들세나일'이 더 나을까?

: 들어갈 때는 세력에 의지해서 이득을 보려 했으면서

나올 때는 일개 구성원에 불리해서 아무 힘이 없었다고 빠져나오려 하기.


세력에 의지하면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게 되고,

나름대로 과실은 같이 나눠 먹고 싶은 간사한 마음.

이런 로집불조 내지는 들세나일의 마음이 주변에서 보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나 자신도 또 돌아본다. 혹시나 내가 속한 집단과 세력의 등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진 않았는지. 





4. 마치며


개인과 집단.

이 무거운 테마 앞에서 나는 자유를 생각한다.

작금의 세상은 점점 부자유를 향해 가고 있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져야 함에도, 자신의 삶을 세력과 국가에게 바쳐버린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쉬이 자신의 자유를 괴물에게 헌납한다. 빵을 대가로.

더 큰 슬픈 사실은 이런 사람들은 자신과 달리 괴물에게 자유를 헌납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만히 놔두질 않고 억압하는 데에 있다. 

그들은 마침내 스스로가 더 흉측한 괴물이 되고 만다.


"사람들은 추상적인 존재에게 구체적인 존재를 제물로 바친다.
사람들은 또한 개별적인 인간들을 전체로서의 인간을 위하여 제공한다."

     - 뱅자맹 콩스탕, <정복의 혼> 中



당신의 삶은, 그리고 당신은 세력에 의지하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끄적 한 끼] 0. Prologu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