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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owly Jan 04. 2024

[서평] 냉정과 열정사이

그리고 화양연화


잔인하게도 삶은 몇 초사이의 선택에 의해 거대한 운명의 필연적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항상 그렇지만 시간의 점 위에서 그 순간의 중대성을 미리 알 수 없을 뿐입니다. 마치 쥰세이처럼 말이죠. 그리고 그런 인물들은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에도 있습니다. 두 번 다시없을,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 두 사람은 고민하고 주저합니다. 쥰세이와 아오이 또한 자신들의 화양연화를 스스로 망치고 헤어져버립니다.


쥰세이가 그랬듯, 화양연화의 주모운(양조위 扮) 역시 벽에 구멍을 내고 비밀을 말한 뒤  돌아가며 인생의 한 지점을 수백 번 수천번 후회했을 것입니다. 영화처럼 또는 여느 영상 매체처럼 되감기를 통해 앞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었을 그 처절한 후회는 한 사람의 인생을 무력하게 만들어버리죠. 새로운 연인이 있어도,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을 하더라도 마음속에서 떠나보낼 수 없는 한 사람의 존재는, 그렇게 상대를 그리워하다가 일상으로 돌아가는 우울의 반복일 뿐입니다. 두 작품 모두 바람-또는 불륜-과 열렬한 사랑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곁에 연인을 두고도 마음속에 다른 이를 간직하는 것은 지극히 잔인한 행위일 테지만, 아니요, 사랑은 원래 이기적인 감정인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나는 마른 잡초처럼 타들어갈 뿐 스스로 진화해내지 못하는 존재니까요.


이미 너무도 유명한 이 작품은 두 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Blud 그리고 Rosso.

저는 멜로 영화나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 편임에도, 이런 통속 소설에 빠져 들게 만든 작가(특히 츠지 히토나리)의 필력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굉장히 섬세하고 우울하며 나약하지만 깊은 곳에 숨겨진 열정과 분노를 가진 남자 주인공은 실제로 만나 본 듯한 느낌을 줍니다. 너무 익숙해서 어쩌면 일정 부분 나 자신에 대한 투영인 듯 가깝게 느껴지는 그 예민함이 낯설지 않습니다. 반면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자기중심적인 독백으로 이루어져 끊임없이 아오이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더디 읽히는 문장은 아오이의 마음 그 자체로 느껴져 더욱 와닿는 부분도 있는데, 그것이 작가의 의도인지 또는 부족한 필력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오이가 만약 실재한다면 그래서 그녀가 일기를 썼다면 아마 이 작품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들기도 합니다. 한편 주인공들의 사랑은 너무도 위태롭고, 가엽고 때론 답답하지만, 섬세한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한없이 감정이 이입되어 준세이의 사랑을 또는 아오이의 사랑을 때로는 메미의 사랑을 응원하고 지지하게 됩니다.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말이 저열하게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애정의 순수함은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무지한 순박함이 있던 시절엔 의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었던 것이죠. 결과론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의도나 과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한 번의 연애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치기 어린 미성숙한 열정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결국 떠나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사랑하는 이의 자리에 후회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순수한 사랑은 아름다울 수 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순수한 사랑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상대를 아프게 합니다. 순진구무의 무책임함은 마음 가는 대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랑을 나눠주는, 사랑을 다시 빼앗아오는 잔인함을 열정적인 사랑의 표현으로 포장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너무도 조심스러운 혹은 소심한 더 나아가 신중한 사랑은 찰나의 순간을 놓치고 맙니다. 마치 화양연화의 주모운(양가위 扮)과 소려진(장만옥 扮)처럼 누구보다 사랑하면서 누구보다 거리를 두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니 나와 함께 떠나자는 말 대신 이별을 연습하자고 말하는 어리석음으로 서로를 놓아주고 마는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결국 무한의 점으로 이루어진 삶에서 어느 한 지점-도저히 미리 알 수 없었던 중요한 순간-을 지나치고 나면, 그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므로 후회만 남겨져 우울을 감내하며 살아갈 수밖에요.


그런 의미에서 쥰세이는 과거의 자신을 스스로를 구원해 낸 사람일 것입니다. 비록 아오이는 자신의 마음속 동굴로 다시 돌아가려 했지만,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용서하고 이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냉정과 열정' 원작의 결말은 영화의 결말과는 사뭇 다른데, 저는 원작의 결말이 더 좋습니다.

우리는 전지적 시점에서 볼 수 있으니까요. 누군가는 또다시 버려진 것에 허탈(또는 체념)의 감정을 느끼며 돌아가고, 누군가는 본인답지 않은 용기를 내어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그 순간들을 지켜보며 그들의 마음이 꼭 갈무리되지 않더라도 우리의 감정은 충분히 정리되어 현실에서의 연인, 배우자에게 뜨거운 눈길을 보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면 안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화양연화일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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