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죄송한 삶을 좀 살고 싶은데.
내 잘못이 아닌 일에 습관적으로 사과하면, 상대가 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비즈니스 관계에서'라는 전제가 붙은 조언이었다.
그런데 보통 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사적인 관계에서도 쉽게 사과하지 않더라.
그러나 내 잘못이 아닌 일에 '죄송하지만'을 붙인다고 그게 내 잘못이 될까?
만약 오해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내 잘못이 맞았을 수도 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나 하나였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만약 오해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면, '죄송'은 예의상 붙인 말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식당에서 음식이 잘못 나왔을 때, 사장님께 "죄송하지만 주문이 잘못 나온 것 같아요. 주문 좀 다시 확인해주시겠어요?"라고 한다고 잘못 들어간 주문이 손님의 탓이 되는가?
만약 어떤 일이 내 잘못으로 인해 벌어졌다면, 그것이 작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다. 작더라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배우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죄송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설명하고,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본인의 잘못에 대한 인정 대신, 그럴 의도가 아니었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체계적으로 전달한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아닌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생각과 의도는 그저 일이 벌어진 이유, 즉 '의도 없음'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의도 없음'과 '잘못 없음'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임을 알아야 한다.
어쩔 수 없었더라도, 그럴 의도가 아니었더라도, 잘 몰랐었더라도,
어찌 됐든 실수는 실수고, 잘못은 잘못이다.
죄송한 사람들은 잘못 있음에 대해 먼저 사과하고, 그 이후에 의도 없음에 대한 설명(변명)을 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상대가 부디 설명(변명)을 납득해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죄송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15년도 1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 나는 잘못과 사과에 대한 고민을 했나 보다.
다이어리에 아래와 같은 글이 적혀있다.
내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용기,
내 잘못을 바로잡을 줄 아는 용기,
잘못한 사람을 기꺼이 용서해줄 줄 아는 용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바로잡는 것을 나누어 생각했다는 사실에 그 시절의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6년이 지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오늘 밤의 나를 칭찬한다.
나는 잘못을 인정하고, 맞서서 바로잡고, 정직하게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죄송하기만 한 삶, 민폐 끼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 잘못이 아닌 일에 호구처럼 사과하겠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저 내 잘못으로 일어난 일에 죄송하다는 말 대신 유감스럽다는 표현을 쓰고 싶지 않다.
과하게 죄송함을 표현하지 않지만, 확실하고 정중하게 존중이 담긴 죄송함을 전하고 싶다.
필요할 때 용기 내어 사과하고, 기꺼이 용서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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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며.
그냥 갑자기 몇 년 전에 죄송한 일에 죄송하다고 했다가, 죄송하다는 말을 쓰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생각나서 쓴 글이다. 우리가 잘못한 일이었지만 '더 분명하게' 우리의 잘못이 될 수 있으니, 쉽게 사과하고 인정하지 말라고 했다. 도대체 뭘 가르치고 난 또 뭘 배운 건지.
그러나 그와 같은 일은 그 뒤로도 두 번쯤 더 있었다. 즉, 나는 그 뒤로도 두 번쯤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고 우길 수도 있는 애매한 실수를 했고, 살면서 서로 다른 세 명의 어른들에게 사과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좀 더 하다 보면, 나도 누군가에게 쉽게 사과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부디 10년, 20년 뒤에도 잘못한 일은 사과하고, 잘못된 일은 바로잡고, 잘한 일은 칭찬하고, 잘된 일은 축하해주는 삶을 살고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