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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설의 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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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석 Jan 18. 2022

두 번째 퇴근길

오에 겐자부로 [만엔 원년의 풋볼]

구글 번역기가 없을 때는 어떻게 진료했을까, 싶을 때가 있다. 내가 일하는 공업도시에는 이주 노동자가 많다. 국적도 다양하고 공장마다 민족지적 특성도 다르다. 이 공장에는 중국 동포들이, 저 공장에는 인도네시아인들이, 어떤 공장에는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들이 주로 일한다.


번역기를 자주 사용하다 보니 노하우도 쌓였다. 우즈베키스탄 분과 대화할 때는 우즈베크어보다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편이 낫다. 인도네시아 분과 대화할 때는 문장 단위가 아닌 단어 단위로 한국어를 입력하면 소통이 더 수월하다. 국가명과 공용 언어명이 다른 경우도 꽤 있다. 오래전 캄보디아분을 처음 마주하고서 ‘도착어’ 난에 ‘크메르 어’가 아닌 ‘캄보디아어’를 입력하고는 “이게 왜 안 되지?”라며 혼잣말을 한 적도 있다.


얼마 전에는 미얀마에서 오신 분이 외래로 왔다. 축산가공업에 종사하시는 분으로, 이 업종에서 주의해야 하는 질환은 천식과 피부염이다. 동물 털, 소독약 등으로 호흡기계나 피부에 문제가 생기면 법에 따라 모든 직원들이 검사를 다시 받아야 한다. 노동자의 건강과 직결되는 동시에 사업주의 수익과도 관련되기에 신경이 쓰인다. 사업주가 많이 벌수록 노동자의 건강도 나아진다면야 고민이 없겠지만 세상이 어디 그런 적이 있었나.


미얀마분과 번역기 필담으로 대화하며 상담을 마칠 즈음, 문득 한 마디를 덧붙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한 오지랖인가 싶기도 했지만 안 하면 후회될 것 같았다. “선생님의 조국과 가정에 하루빨리 평화가 돌아오기를 바랍니다”라는 문장은 곧바로 버마어로 번역되었고 그분은 화면을 바라보다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라는 한국어 인사와 함께 그분이 진료실을 떠난 뒤에 나는 조금 멍해졌는데, 그날이 한 사람의 미소로 기억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날도 퇴근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혼자 밥을 챙겨 먹었다. 코로나19 이후로 회식이 사라진 것은 개인적으로 다행이나 연고 없는 곳에서 매일 혼자가 되는 기분이 늘 달가울 수만은 없다. 그나마 심심치 않게 보내는 것은 써야 할 소설이 있어서다. 집에서 쓰는 습관을 들이지 못한 탓에 설거지를 하고서 다시 출근하듯 숙소를 나섰다. 인적이 드문 단골 카페까지 걸어서 사십 분 정도 걸린다. 이러다 폐업하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조용한 공간은 더없이 소중하고, 그곳에서 두어 시간을 쓰고 나면 두 번째 퇴근을 한다.


두 번째 퇴근길에도 이주민들이 있다. 밤이 깊어진 골목마다 각기 다른 언어가 들려온다. 몽골어가 들리는 골목도 있고, 우즈베크어가 들리는 골목도 있고, 아랍어가 들리는 골목도 있다. 그들은 거리를 걸으며, 혹은 편의점 근처에 앉아 선선한 밤공기를 즐긴다. 방역 조치가 완화된 덕에 술집은 자정까지 성업 중이지만 통유리창 안에서 그들을 보는 일은 드물다. 소주를 마시며 하루 치 피로를 푸는 뭇사람들을 박하게 탓할 생각은 없다. 다만, 마스크를 꼭 낀 채 두셋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이주민들의 모습은 감염병이 증폭시킨 혐오의 칼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다수자의 세계에서 이질적인 존재들은 자신에게서 비롯된 조금의 흠결이 자신이 속한 집단 전체에 위해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 옆을 지나치면서 오래전에 쓰인 소설에 나오는 한 인물을 생각한다. 그 인물은 오에 겐자부로가 1967년에 발표한 소설 『만엔 원년의 풋볼』에 등장하는 조선인 상인, ‘슈퍼마켓 천황’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코쿠 산골 마을은 전후 일본을 표상하는데 마을 지도자 가문의 탕아 다카시는 방황 끝에 귀향하여 불황에 허우적대는 고향의 모습에 울분을 느낀다. 다카시는 마을을 파탄 낸 주범으로 슈퍼마켓 체인점을 지목하고 무기력에 빠진 마을 청년들을 규합해 그곳을 습격할 계획을 세우면서 체인의 회장인 ‘슈퍼마켓 천황’과 마을 외곽의 조선인 부락에 대한 적의를 고취시킨다.


전후 일본사회에서 조선인은 옷, 음식, 언어가 다른 돌출된 존재였다. 산골의 경제권을 장악한 자가 조선인이라는 점은 마을사람들에게 수치심과 혐오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동시에 슈퍼마켓 천황은 항거할 엄두도 내보지 못한 진짜 강자, 즉 덴노나 전범 정치가, 미군정의 상상적 대리자이기도 하다.


작가는 실제 권력에게는 감히 표출하지도 못하는 분노가 엉뚱한 대상에게 향하는 잔혹한 진경을 기괴하면서도 코믹한 서사로 그려내는데, 소설이 발표된 지 5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도 현재적이다. 지속된 양극화 끝에 들이닥친 범지구적 재난은 인간의 인과성 추구 본능을 폭력적으로 가속화했다. 탓할 상대를 찾으려 혈안이 된 모습은 포털 뉴스 댓글창만 내려도 손쉽게 보인다. 그런데 그럴 수 있을까. 눈앞에 있어도, 곁에서 숨을 쉬고 있어도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소설의 말미에 이르면 슈퍼마켓 천황은 실물로 등장해 “백승기입니다”라고 마을사람에게 인사를 건넨다.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적이, 마음껏 혐오하고 증오하던 대상이 얼굴이 있고, 말을 하고, 촉감으로 닿는 ‘백승기’라는 인간으로 눈앞에 나타나자 마을사람들은 침묵으로 도망친다.


마주 보는 것은 타자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분명 달라진다. 내가 이국의 언어가 떠다니는 밤거리를 통과하여 두 번째 퇴근을 할 때, 느릿하게 골목을 주유할 수 있는 까닭의 팔 할은 성인 남성이기 때문이지만 여성이어서 느끼게 되는 밤길의 공포로부터 자유롭다는 특권을 제하더라도 이들을 마주하지 못했더라면, 자주 말을 섞어보지 않았더라면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지금보다 훨씬 빨랐을지도 모른다.


일찍이 오에 겐자부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삶을 다시 고쳐 살 수 없지만, 우리는 삶을 고쳐 살 수 있다.” 우리는 그럴 수 있다. 파편화된 개개인이 조금씩 생각을 달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수선할 수 있다. 작가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그의 소설과 생애에서 배운 것처럼, 인간이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그의 문장을 통해 되새긴다.


중앙일보 2021년 10월 30일 기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19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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