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보 머그더 『도어』
서보 머그더의 『도어』(김보국 역, 프시케의 숲, 2019)를 보자. 이 소설은 총 스물세 챕터로 이뤄져있는데 첫 챕터와 마지막 챕터의 제목이 동일하다. 바로 ‘문(Door)’이다. 그중 첫 번째 ‘문’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에메렌츠를 죽인 것은 나였다. 그녀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했다는 말도, 여기서는 그 사실 관계를 바꿀 수 없다.” 이 두 문장은 남은 스물두 챕터가 화자인 ‘나’와 화자가 스스로 죽였다고 선언한 ‘에메렌츠’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임을 예고한다. 또한 에메렌츠를 죽이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했다고 함으로써 이것이 살인에 대한 이야기이기는커녕, 외려 활인(活人)의 의지가 낳은 어떤 오류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저명한 작가다. 헝가리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인 서보 머그더 자신을 연상케 하는 이 인물은 20여 년간 집안일을 돌봐준 가정부 에메렌츠를 회고한다. ‘나’는 에메렌츠가 관리하는 공동주택에서 지내는데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이 노년의 여성은 1·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온몸으로 겪었다. 가족과 친구의 죽음을 숱하게 목도했던 그는 살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켰다. 그 결과 매우 자주적이며 독립적인 여성이 된다. ‘매우’라는 단서가 붙는 까닭은 화자가 보기에 에메렌츠의 자주성과 독립성은 괴팍함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신의 집 안에 들여놓지 않는 괴팍함. 재산과 금전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괴팍함.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퍼부어대면서 타인을 정서적으로 지배하려는 괴팍함.
단지 괴팍함이 에메렌츠를 수식하는 전부였다면 소설이 진행될 리 없다. 이 노인은 어느 모로 보나 호감이 가지 않지만 가사노동만은 기예에 가깝게 해낸다. 화자와 에메렌츠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장치가 이 흠잡을 데 없는 노동이다. 그 덕에 화자는 에메렌츠의 다른 면모를 보게 된다. 곤경에 빠진 화자를 헌신적으로 돕는 것은 물론, 타인을 절대 들이지 않는 자신의 집으로 갈 곳 없는 개와 고양이를 들이고,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정을 베푼다. 에메렌츠와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화자는 조금씩 이해한다. 괴팍하기 때문에 헌신도 가능하다는 것을. 비관적이고 냉소적이었기에 에메렌츠는 잔혹한 시대를 넘어 일인분 이상의 삶을 지탱해낼 수 있었다.
『도어』는 이렇게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특성이 공존하는 한 인물을 보여주면서 두 가지 고전적인 서사를 따른다. 하나는 ‘기인(奇人)’에 대한 서사이며, 다른 하나는 ‘돌봄(care)’에 관한 서사다. 평론가 신형철이 책 말미에 덧붙인 추천사에 문학사의 대표적인 기인, 조르바가 등장하는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카잔차키스를 닮은 서술자와 대비를 이루면서 조르바가 빛났듯이 에메렌츠는 화자와 대비되면서 빛이 난다.
그러나 조르바와 에메렌츠를 병치시키는 것에는 쉽사리 동의되지 않는데, 조르바와 달리 에메렌츠는 소설 내내 돌봄 제공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인으로 설정된 에메렌츠가 보여주는 자유의지는 언뜻 그와 화자와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에메렌츠가 펼치는 기행과 독단은 그의 정서적 강인함을 대변함으로써 관찰자인 화자가 가진 유약함을 압도한다. 이런 정서적 불균형은 양자가 서있는 계급적 토대를 가린다. 에메렌츠는 돌봄을 제공하는 노동계층이며, 화자는 돌봄을 제공받는 중산층 지식인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말이다.
우리가 돌봄을 말할 때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 이 가려진 그림자에 숨어있다. 그것은 ‘위치’다. 좀 더 정확히는 ‘발화자의 위치’다.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감염병이 창궐한 뒤, 재난 앞에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취약하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하면서 돌봄은 시대의 화두로 떠올랐다. 타자를 깎아내려 제 존재를 증명하려는 혐오의 문화가 판을 치는 풍경이나 혈혈단신으로 불황에 맞서보고자 주식과 코인에 몰두하는 풍경은 역설적으로 더 이상 독존하는 개인이 불가능함을 방증한다. 말하자면 이는 근대적 개인이 내지르는 최후의 비명인 셈이다. 서로의 취약함을 인정하고 서로에게 기대어 그 취약함을 보완하자는 돌봄의 의미는 지나가는 유행이 아니라 새 시대의 윤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예외 없이 떠안게 된 재난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무게로 그 짐을 짊어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똑같이 취약한 인간이지만 각자가 가진 취약성은 각자가 놓인 위치에 따라 모두 다르다. 그리고 누군가는 분명 다른 누군가보다 더 많은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에메렌츠를 죽인 것은 나였다”라는 문장에서 예고된 바, 소설의 후반부는 파국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에메렌츠와 화자가 상호간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서로를 받아들인 결과다. 강렬하게 대립하던 두 인물은 2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며 어느새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다.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에메렌츠의 ‘문’이 열리면서 그는 육체적으로 쇠약해진다. 그가 숨기고자 했던 과거도 드러난다. 타인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타인에게서 비롯될지도 모르는 위험 또한 감수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온전히 화자의 입장에서만 서술되기에 에메렌츠가 그런 위험을 얼마나 감수했는지는 끝내 알 수 없다.
어쩌면 작가의 한계일지도 모를 화자의 한계를 느끼면서 쓰는 사람으로서 나의 위치를 되묻게 된다. 영원한 침묵 속으로 들어간 에메렌츠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다는 갈망은 사실 내가 놓쳤고 앞으로도 놓치게 될 목소리들에 대한 회오는 아닐까. 물론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게 공평해지기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정말 불가능한지 확인이라도 해보고자 노력하는 일. 아주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려고 시늉이라도 해보는 일. 소설을 읽고 쓰는 일이란 아마도 그런 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