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 [하나의 숨]
올해 중순에 교육청으로부터 협조공문을 받은 뒤로 특성화고·마이스터고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용접, 납땜 등 실습수업에서 노출되는 유해인자가 학생들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고 상담하는 일이다. 이와 별개로 민간단체에서 구성한 청소년 안전보건교육팀에도 미약하게나마 힘을 보태고 있는데, 공공과 민간 영역에서 공히 이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는 주지하다시피 청년들의 연이은 죽음 때문이다.
계기와 달리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밝다. 지나치게 밝아서 끊임없이 떠드는 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교실 뒷자리에서 악착같이 떠들던 내 아잇적 모습을 떠올린 뒤로는 그냥 놓아버렸다. 웃고 떠들 수 있는 것도 때가 있고, 이들에게는 지금이 바로 그때니까.
장난치기 바쁘던 학생들도 개인 상담을 받을 차례가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해진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느냐는 질문에 요통을 달고 산다는 대답이 가장 많이 나온다. 잠을 제대로 못 잔다는 대답도 못지않다. 코로나19 이후로 더욱 좁아진 취업문을 뚫으려면 각종 기능대회에서의 입상경력이 요구된다. 자격증도 몇 개는 기본으로 따야 한다. 작업복과 비슷한 교복을 입고 공장과 꼭 닮은 실습실에서 연습에 매진하느라 생긴 요통과 불면증을 ‘직업병’이라고 부르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가슴이 철렁거릴 때도 있다. 불안, 수치심, 과잉각성 등 고도의 스트레스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로, 이 학생들은 모두 사업체로 현장실습을 나가고 있었다. 이해관계가 없는 외부인은 이럴 때 대나무 숲이 되곤 한다. 이르게 사회로 나가 경계인이 된 청소년들이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꺼내게 되면 나는 미처 알지 못했던 세계로 이끌려 들어가지만 그것도 잠시, 상담공간을 나가면서 하나같이 하는 말에 또 다른 벽이 세워진다.
“담임 쌤한테는 절대 말하시지 마세요. 저 돈 벌어야 돼요.”
어떤 말들은 다만 묻어두기 위해 발화된다. 듣는 것만이 나의 몫일 수밖에 없을 때 무력감은 엄습한다. 이미 들어버린 말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흐른다. 조해진의 단편 ‘하나의 숨’(『환한 숨』, 문학과 지성사, 2021)에도 이미 들어버린 말 때문에 사건에 연루된 화자가 나온다. 직업계고 기간제 교사인 화자는 얼마 전 더는 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학교 측의 통지를 받았다.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남자친구에게 아직 그 말을 하지 못한 채 같이 저녁 식사를 하는데 제자인 ‘하나’로부터 전화가 온다. 평택의 한 사업체에서 실습 중인 하나는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지난달에 실습 나갔던 공장에서도 일주일 만에 그만둔 전력이 있는 제자에게 화자는 남의 돈 받는 게 원래 쉽지 않다며, 그건 남들도 다 똑같다고 말하고는 이렇게 덧붙인다.
“하나야, 좀 참아봐.”
한 달 뒤. 하나는 회사 3층 작업장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중환자실에 누워 숨만 쉬고 있는 하나. 이제 계약만료를 불과 보름 앞둔 화자는 ‘2주짜리 선생’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며 사건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런 화자를 다시 하나에게로 이끄는 것은 하나의 엄마다. 하나의 엄마는 사업체에서 일방적으로 건넨 보상금과 서약서를 돌려주러 가는 길에 화자가 동행해줄 것을 부탁한다. 이 소설의 화자가 재해당사자가 아닌, 주변인이라는 점에 주목해본다. 화자는 어쩔 수 없이 사건에 연루된 평범한 사람이다. 자기 짐만으로도 무거워 사건에서 멀어질 수 있다면 멀어지고 싶은 생활인이다.
작가가 이러한 화자를 택한 까닭은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타인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자격을 심문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일 터. 타인의 언어를 가로채지 않고, 타인의 목소리를 점거하지 않으면서도 반드시 말해져야 하는 것이 있다면 쓰지 않을 수 없다는 모순은 현실에 발붙인 글을 쓰는 이라면 피하지 못할 숙제다. 해답이 나올 리 없는 이 숙제의 난경처럼 ‘하나의 숨’에서는 어떤 사건도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는 여전히 중환자실에 있고, 하나의 엄마는 보상금과 서류를 돌려주지 못했으며, 화자는 예정대로 학교를 떠난다.
가끔씩 당사자의 목소리가 세상을 울릴 때가 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죽음과 함께 비로소 그 목소리를 듣는다. CJ진천공장 김동준, LG유플러스 홍수연,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 평택항 이선호, 여수선착장 홍정운. 이는 유가족의 용기에 힘입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소수의 사례다. 더 많은 이름들이 소리 없이 사라졌고, 나 또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몇 명의 이름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 이 부작위는 침묵이라기보다는 외려 웅변이다. 소설의 끝에 이르러 다른 일을 시작한 화자는 어느 퇴근길에 하나가 내쉬던 숨을 생각한다. 충동적으로 지하철에서 내려 택시를 탄 화자가 가는 곳은 평택. 그곳으로 향하면서 화자는 ‘가까스로, 자꾸만 꺼지려 하는 심장을 바닥에서부터 부풀리며’ 내쉬는 하나의 숨을 느낀다. 허공 속에서 두 사람의 숨이 뒤섞이며 교감하는 모습은 학생이라는 딱지를 떼기도 전에 일하러 가야 하는 삶에 대해 상상해볼 의지조차 없는 어른들이 현장실습을 폐지하면 되지 않느냐고 무람없이 내뱉는 소리를 넘어,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드는 것만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조용히 외치고 있다. 문학이 무도한 세상을 향해 소리치는 방식은 때로는 이렇게 잔잔하며, 그 잔잔함은 어떠한 외침보다도 더 깊이, 더 멀리 뻗어 나간다.
중앙일보 2021년 12월 4일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