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9번의 일]
젊은 사람이 죽으면 울음소리부터 다르다. 진료실 책상 뒤로 너른 창이 있다. 운구차량이 서는 곳은 창과 멀지 않다. 발인은 주로 새벽에 이뤄지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아 외래를 시작하고서도 흐느낌이 들려올 때가 있다. 단장(斷腸)의 소리에 내원객과 나 사이에도 정적이 잠시 내린다.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는 내원객의 시선을 따라 나도 힐끔 돌아보면 운구차량 앞에는 어김없이 작업복 점퍼 차림의 사람들이 있다. “에혀…” 하고 탄식을 내뱉는 내원객도 저 남자들과 비슷한 점퍼를 입고 있다.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점퍼. 한쪽은 원청의 점퍼고 다른 한쪽은 하청의 점퍼다. 하청의 하청의 점퍼일 때도 있고, 하청의 하청의 하청의 점퍼일 때도 있다.
공업도시에서 점퍼는 상징이다. 더 드러내고 싶은 쪽만이 일터가 아닌 일상에서도 그것을 입는다. 마트에서도, 헬스장에서도, 카페에서도, 식당에서도 보이는 원청의 점퍼는 서울 명문대생들이 즐겨 입는다는 ‘과잠(학과 점퍼)’을 연상케 한다. 문제는 점퍼의 차이가 일상에서 티를 내고, 티를 내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점퍼를 입은 사람들에 비해 다른 점퍼를 입은 사람들의 건강은 명백히 더 나쁘다. 2020년 정연, 김명희, 김인아 등이 쓴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는 하청·하도급 등 고용 형태가 불안정할수록 작업장 건강 위해 요인에 노출되는 비율은 높아지는 반면, 이에 대한 대응 자원이나 보호 요인은 낮아진다고 결론짓고 있다. 이런 결론 뒤에 뭇사람들은 “더 노력했으니 더 안전하게 사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는 말을 무람없이 덧붙이고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투입하는 만큼 산출이 이루어지는 안일한 세상 속에서 단지 운 좋게 살아왔던 자들의 허술한 세계관일 뿐이다.
김혜진의 소설 『9번의 일』(한겨레출판, 2019)은 한 남자의 행보를 통해 이 허술한 세계관을 낱낱이 찢어놓는다. 남자는 한 통신회사에서 26년을 일했다. 남자는 “자그마하던 회사가 지금처럼 큰 기업으로 성장했다는 데에 비밀스러운 자부심과 동료의식이 있었”지만 구조조정을 시작한 회사는 남자를 ‘저성과자’로 분류하고 26년간 하던 일과 전혀 무관한 업무를 떠맡긴다. 급기야 아무런 일도 맡기지 않으면서 무언의 압박을 지속하는데 남자는 이를 모른 척 한다. 회사에서 어떤 오해를 한 거라고, 어떻게든 열심히만 하면 회사와의 관계가 전처럼 좋아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다. 남자가 아는 삶의 방식이란 “특별할 것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어른이 되고, 자신이 자라온 것과 비슷한 가정을 꾸리고,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면서 자신이 선택한 것들에 책임을 다하는 것”이었으니까. 믿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남자에게는 그렇게 꾸린 가정이 있고, 좀 더 나은 가정을 위해 부동산에 투자한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으니까.
믿음으로 버티던 남자는 상품 판매직으로, 보수직으로, 설치직으로, 특정한 일이 주어지지 않으면서도 온갖 일을 해야 하는 업무지원단으로 차츰 밀려난다. 남자와 비슷한 처지였던 회사 동료 종규는 분신자살을 한다. 역 앞 광장에 설치된 분향소에서 남자는 종규가 그래선 안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마음을 헤아리다 미안함과 후회와 슬픔을 느낀다. 이름 붙이지 못할 감정들이 “스스로 지펴졌다가 사그라드는 내부의 감정들을 우두커니” 지켜본다. 동료의 자살과 그에 이어지는 모종의 사건들 이후 남자는 통신탑 건설현장에 하청소속으로 투입된다. 소설 내내 이름 없이 ‘남자’로 불리던 그는 소설의 마지막 무대가 되는 그곳에서야 비로소 이름을 부여받는다.
‘78구역 1조 9번.’ 소설의 제목이 ‘9번의 일’인 까닭이다. 밀양·청도의 송전탑 반대투쟁 현장을 연상케 하는 그곳에서 남자는 저항하는 노인과 활동가들에게 “옳은 일만 할 수 있으니 좋겠네요”라며 이죽거린다. 타인은 물론 자신에 대해 연민하고 동정하는 것마저 그만두었고 무언가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도 폐기한 남자. 그러나 눈앞에 육박해오는 염치의 풍경 앞에서 ‘다만 회사의 지시에 따르는 것일 뿐’이라는 허약한 믿음은 부서지고 종규와는 다른 차원의 파괴적인 행동을 하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나라면 이 소설을 어떤 식으로 구성했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건을 역순으로 배치한다든가, 특정한 사건을 먼저 제시하는 식으로 서사를 재배치해본 것은 답답할 정도로 우직한 ‘남자’의 이야기가 시간 순으로 정직하게 이어지면서 읽기를 더디게 만든 탓이었다. 하지만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소설을 두어 차례 다시 읽는 동안 이 소설이 지리멸렬하리만치 시간의 흐름을 따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듯했다. 흔히 서사 장르를 두고 ‘삶에서 지루한 것을 뺀 나머지’라고 말하지만 어떤 소설에는 바로 그 지난한 삶이 고스란히 담길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삶은 정말 그러하며, 그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므로.
예컨대 MBC 보도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6년 사이 배전관련 안전사고 사상자 수는 915명으로 이 가운데 90%가 협력업체 소속이었다. 공공기관 중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기관은 한국전력인데 작년 한 해 동안 8명이 현장에서 사망했으며 이들은 모두 하청업체 소속이었다. 연초에 ‘38살 예비신랑의 비극’으로 세상에 알려진 고 김다운씨도 그들 중 한 명이다. 대선 정국과 백신 이슈가 다른 사회문제를 모조리 잠식하는 지금의 언론환경에서 이 비보가 가까스로 비집고 나온 까닭은 죽음의 무게가 그만큼 엄중해서였지만 이런 죽음의 행렬을 개인의 비극으로만 재현하다보면 어디서부터 손을 댈지 알 수 없는 것, 아무리 죽어나가도 어쩔 수 없는 것, 목소리를 내더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체념으로 나아가기 십상이다. 그런데 과연 이 문제가 그렇게 복잡한 일인가. 단지 사람의 목숨 값을 우습게 알기 때문에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나.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 바꾸지 못할 일이 아니라, 단지 누군가는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는 세상이 영속되기를 바라기에 이런 구조가 지속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후자라면, 단순한 사실이 복잡하게 꼬여 속수무책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뿐이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아주 단순한 말로 그 타래를 끊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람을 죽였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그것도 가장 무거운 벌을 받아야 한다고.
(2022년 1월 22일 중앙일보 기고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426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