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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석 May 03. 2022

그래도 되는 사람은 없다

황석영 『손님』

며칠 전 JTBC에서 중계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와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 간의 토론을 보다가 문득 내 대학 시절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십수 년 전인 본과 3학년 때의 일로, 당시 나는 일반외과에서 실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실습생들은 수술보조를 서는 일이 흔했다. 하교 후 집에서 잠을 자고 있던 어느 날 밤, 당직 중이던 동기가 전화를 해왔다. 인근 지역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인력이 모자라니 병원으로 오라는 연락이었다. 비몽사몽간에 병원으로 달려가 수술방에 들어서자 집도의가 다짜고짜 욕부터 해댔다.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집도의는 아마 전문의가 된 지 얼마 안 된 펠로우였을 텐데 성격이 괴팍하기로는 정평이 나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욕을 먹는 것은 실습생의 숙명인 바, 저 사람도 오죽 피곤하면 저러겠나 생각하면서 수술대로 갔다. 먼저 보조를 하고 있던 간호사와 손을 바꾸자 집도의가 더욱 기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지혈을 위해 환자의 배에 집어넣었던 거즈를 꺼내는 족족 다트라도 하듯 내 배와 가슴을 향해 툭툭 던지는 것이었다. 점점이 얼룩져가는 수술가운을 내려다보던 나는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멀거니 그를 쳐다봤는데 외려 뭘 보냐는 식으로 실실거리던 마스크 위의 눈과 그 눈을 보면서 느꼈던 모멸감만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돌이켜보면 그 펠로우는 지금의 나보다도 한참 어렸다. 펠로우를 거쳐 일반외과 교수가 된 친구들을 봐도 밤새 수술을 하고 잠깐 눈을 붙였다가 아침에 또 회진을 하러 나가는 날이 적지 않다. 여전히 적지 않은 의료인들이 인간의 한계를 시험케 하는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게 현실이므로 그때 그 사람이 왜 그렇게 이상한 행동을 했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사람이 했던 비상식적인 행동이 유달리 모멸적이었다는 점은, 달리 생각하면 의료인 다수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수준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어떻게든 이해를 해보려고 한다면 이해가 된다는 것일 뿐, 그 사람이 했던 행동이 용납될 만한 행동일 리는 없다.


‘모멸’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모멸은 언제 발생하는가? 그것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동등한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대할 때 발생한다. 이는 차별과 혐오가 발생하는 구조, 즉 ‘타자화 전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알량한 권위와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열등한 타자를 만들어내곤 한다. 이때 본인과 비슷한 집단과 표면적으로 다른 속성(인종, 민족, 성별, 사회적 지위, 외형적 특색, 언어적 특색 등)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은 손쉽게 ‘타자화’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다른 것’을 ‘열등한 것’으로 바꾸는 마법 같은 사고방식이 한 스푼 더해지는 순간 ‘나는 너한테 그래도 돼’라는 폭력이 족쇄 풀린 채 터져 나온다.


황석영의 장편소설 『손님』(창비, 2001)은 타자화로 인해 한 마을공동체가 지옥으로 변해가는 참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소설은 미국에서 목사가 된 류요섭이 사업 차 북한으로 가게 되면서 시작된다. 출국 직전에 그의 형 류요한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는데, 이후 요한은 귀신으로 요섭 곁에 나타나 고향에서의 일을 조금씩 말해준다. 북한에 도착한 요섭은 사업상의 일정만 마무리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당국은 요섭에게 고향인 황해도 신천에 방문할 것을 반강제적으로 권한다. 본인은 그다지 갈 생각이 없는 곳으로 굳이 데려간 까닭은 미국 시민인 요섭에게 죄책감을 고취시키기 위해서다. 오십 년 만에 돌아온 고향에는 ‘신천박물관’이라는 기념관이 들어서있다. 그곳에는 50일간 군민 6만 명 중 3만 명이 학살된 신천 대학살의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해설원은 미군에 의한 학살로 선전하지만 류요한에 뒤이어 나타난 순남이나 일랑 같은 귀신들과 요한의 아들인 단열이나 소메 같은 생존자들이 요섭에게 들려주는 실상은 다르다.


황해도 신천에는 구한말부터 기독교가 급속히 전파됐다. 지주 계급은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반면 소작인과 하인들 다수는 교인이 아니었다. 귀신으로 요섭 곁에 나타나서도 지주계급 청년 요한과 사사건건 대립하는 순남은 당대의 시대상을 대변한다. 동네의 소작인이었던 순남은 일정 때 광산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접한 적이 있다. 지주계급의 수탈에 시달리면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던 그는 해방 이후 인민위원회 조직을 주동한다. 팔뚝에 완장이 달리자 이때부터 그는 기독교인과 지주에 대한 탄압의 선봉에 선다. 요섭 집안이 탄압의 대상인 것은 당연한 바, 특히 이 집안의 머슴이었던 일랑이 인민위원회에 가담하게 되면서 요섭의 부친은 인민의 적으로 몰리게 되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다. 기독교인 남성들은 죽음이 두려워 야산에 숨어드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연합군 진주와 함께 북한군이 퇴각한 사이 신천은 무정부 상태가 되고, 산속에 숨어있던 교인들은 요한을 중심으로 무장봉기를 일으킨다. 그들은 마을로 내려와 사회주의 동맹에 참여했던 동네주민과 그 가족들을 죽이기 시작하는데 저마다 다른 귀신들의 목소리를 통해 여기까지 들은 요한은 고향에서의 학살이 사실은 우리들끼리 서로를 죽이고 죽였던 일이었음을 알게 된다.


실제 신천에서 벌어진 이 살육의 연쇄에도 각자에게는 저마다 그럴 듯한 논리가 있었다. 순남은 순남대로 ‘안면 있는 이웃이라고 인정을 살피지 마라, 우리를 핍박하던 인민의 적일뿐이다’라며 폭력을 자행했고, 요한은 요한대로 ‘아낙네건 아이건 저들도 빨갱이다. 빨갱이는 다 죽여야 한다’라는 말로 살육을 감행했다. 논리의 목적이 숙의나 합의가 아닌 승리에 불과할 때, 그것은 그저 무기다. 점잖게 포장된 총과 칼이다. ‘이게 팩트임’ ‘반박불가’ ‘레알ㅋㅋ’ 따위의 시쳇말들이 범람하는 현상은 이 총칼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언중의 손에 쥐어졌는지를 가늠케 한다. 하물며 TV 토론이라는 공론장에서 상대에게 던지는 질문이 타인을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면 그 질문을 던진 자가 원하는 것은 생산적인 미래일 리가 없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스피커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는 너희한테 그래도 된다’라는 시그널을 쏘아댈 때, 사회는 혐오를 조장하는 발언을 용인하는 분위기로 나아가게 된다. 그 끝이 어디가 될지 과문한 나로서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역사는, 그리고 그것을 재현하는 소설은 그 끝이 공동체의 와해라는 파국임을 예증한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므로 인간일 수 있다는 믿음은 연약한 허구다. 이제는 인간이기 위해서 어떠해야 하는가를 절실히 물어봐야할 때다.


중앙일보 기고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67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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