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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요가 수행자 May 03. 2024

선생님이 목소리가 안 나와도

아이들은 즐겁다

5월의 시작은 감기와 함께였습니다. 신기하게도 이번 감기는 목만 아프더니, 곧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어버렸어요. 열도 없고 콧물도 없고 오로지 끊임없는 기침뿐입니다.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으니 첫날엔 짜증만 났어요. "자자, 선생님보다 작게 말하기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신나서 떠드는 학생이 있고 저는 그 학생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가 버럭 소리라도 지르면 짜증이 치솟았습니다.


그렇게 힘든 하루를 끝내고 집에 오는데 이래서는 목이 낫지를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음날은 말을 해보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학교에 갔습니다.




아침 조회는 컴퓨터 판서로 시작합니다. 선생님이 오늘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말을 안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1~2교시는 만들기 시간, 지난번에 만들기 준비를 했던 자료를 주고 만들기 동영상을 틀어줍니다. 그리고 무작정 내 맡겨버렸습니다. 제대로 하고 있는지 엉망으로 하고 있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말할 수 없으니 그냥 둡니다. 그렇게 음악을 틀어놓고 얼마쯤 지났을까요? 자기들끼리 다한 학생들이 나오더니 마지막 모둠의 제목을 만들고 스스로 이어 붙입니다.


그런데 이번 만들기는 퀄리티가 다릅니다. 어쩌면 이렇게 색칠도 꼼꼼하게 했을까, 잔소리도 하지 않았는데 너무 신기합니다.




수학시간에는 여러 가지 모양을 배웁니다. 쌓아보기를 하는 시간이라서 쉬는 시간에 쌓기 놀이를 할 모양들을 바구니에 잔뜩 담아왔습니다.


바구니에서 모양을 꺼내보고 맞춰봅니다. 속삭이는 듯 눈짓으로만 말을 해도 철석같이 알아듣습니다. 대망의 쌓기 놀이 시간,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대로 그대로 둡니다. 짝끼리 하다 보니 투닥거리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결국 둘이 같이 쌓아갑니다. 아이들이 너무 즐거워해서 사진까지 찍을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을 안 하고 집에 갑니다. 확실히 어제보다 목을 안 쓰니 상태가 좀 나아졌습니다.


목소리가 안 나올 때는 정말이지, 그냥 집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막상 병가를 쓰는 것은 좀 어렵게 느껴집니다. 내가 쉬면 애들은 누가 가르치지 걱정부터 됩니다. 열이 나고 독감에 걸리거나 몸져눕지 않는 이상 학교를 빠지는 건 마음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결국 또 학교에 갑니다. 이번엔 운동장 수업입니다. 소리는 못 지르지만 저에게는 호루라기가 있습니다. 계주 선수를 뽑고, 운동장에서 잠시 노는 시간을 가집니다. 잔소리는 없습니다. 눈치만 좀 줄 뿐입니다. 아이들이 싸우지 않고 평화롭습니다. 목소리를 잃었어도 평화로울 수 있다는 걸 깨달아봅니다.


수업 중에 갑자기 사랑고백을 받았습니다. 장난꾸러기 남자아이가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립니다. 선생님 사랑해요! 저도 따라서 하트를 그렸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은지 참 오래되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사랑해!


잠시 사랑 고백 타임을 가졌습니다. 어쩌면 선생님이 좀 덜 말해야 아이들이 더 행복한지도 모르겠습니다.





* 사진: UnsplashElement5 Dig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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