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골프장을 지어야만 하나
요가가 끝나고 오늘은 섯알오름 4.3 유적지에 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알뜨르 비행장과 섯알오름은 바로 근처여서 주차장으로 네비를 찍었다. 차로 6분. 정말 가까운 거리이다.
날씨는 화창한 봄날. 따뜻하고 화사하다. 알뜨르 비행장으로 가는 길은 사방이 넓게 펼쳐진 밭이다. 트럭들 몇 대가 길가에 세워져 있고, 포장도로는 어느새 비포장 도로로 변해 있다. 밭에서는 햇빛을 가리는 모자를 쓰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불쑥불쑥 태평양전쟁에 사용했던 일본 전투기 격납고가 모습을 드러낸다. 평화로운 풍경 사이에 역사적 흔적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제주에 관광지도 많고 예쁜 카페도 많은데 굳이 이런 곳에 와야 하냐고 물을 수 있다. 여행자라면 일부로 찾아오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동네에 이사 온 주민으로서 꼭 한 번은 들려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면 어쩌지 걱정을 했는데 웬걸. 사람들이 하나 둘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한다. 유적지를 찾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널따란 평야는 제주공항을 연상하게 한다. 이곳에서 일본 전투기들은 활주로를 달려 태평양 전쟁을 위해 출격했을 것이다. 평화로운 하늘 위로 날아올랐을 전투기들을 생각해 본다.
알뜨르 비행장 바로 옆에는 섯알오름이라는 4.3 학살터도 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가둬두었던 사람들을 A, B, C, D 등급을 매겨 이곳에서 학살해 묻어버렸다. 전쟁이 시작된 뒤 빨갱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미리 처분한 것이리라.
두 개의 구덩이에 2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묻었고, 시간이 흐른 뒤 유골들은 다른 곳으로 옮기고 이곳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올레길 10코스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올레길을 걷는 중년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많이 계셨다.
그중 두 명의 중년 아저씨가 함께 걷다가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연배가 어린 남자가 갑자기 얼차렷 하는 말투로 말해서 뒤돌아보니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 말을 화를 내고 있었다.
"이렇게 안 했으면 우리도 다 북한처럼 되는 거야. 뭐 알기나 하고."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내려오니 바람이 분다. 대정이 원래 바람이 강한 곳이라고 하는데 왜 바람이 부는지 알 것 같다. 바다를 마주하고 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바닷바람이 막힘없이 그대로 들어온다.
유적지 앞에 가면 막상 할 말을 잃는다.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 잠시 서서 눈을 감고 기도를 한다. 바람이 온몸을 감싼다. 바람이 이리저리 휘몰아치는 소리를 듣는다. 바람이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진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제주는 역사의 현장들이 자연 속에서 잘 보존되어 있구나. 그래서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찾아가서 느껴볼 수 있구나 하고.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고 며칠이 되지 않아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알뜨르 비행장 주변이 스포츠 타운으로 개발될 예정이란다. 아니 왜 여기에?
지난 2024년 11월에 발표가 났다. 평화 대공원을 만들려던 기존 계획 대신 사격장, 야구장, 축구장, 골프장을 짓겠다는 것이다. 제주도에 골프장이 많고 많은데 여기에 또 골프장을 지어야 하는 것일까?
또 얼마 전에는 국방부에서 사격장을 증축하겠다고 발표를 했다. 기존의 사격장에 더불어 6배 넓은 사격장을 알뜨르 비행장 근처에 증축하겠다는 것이다.
http://www.samda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44688
대정읍 상모리로 들어서는 길에 돌하르방이 서 있는 곳이 있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 웃음이 났다.
자연보호. 자연이 살아야 우리가 산다. 세상에 제주도만큼 자연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곳이 어디 있다고 이런 걸 세워놨지 싶었다.
이제야 알겠다. 제주도도 아직 지켜야 할 것이 많다는 걸.
비포장된 도로, 밭두렁 사이로 빼꼼히 나와있는 전투기 격납고와 뒤로 보이는 산방산.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 있는 것들.
굳이 그 벌판에 골프장 야구장 축구장 사격장을 지어야 하는지. 정말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