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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스푼 Jun 15. 2022

砲身의 追想

지난 일이 나를 머뭇거리게 할 때

나의 군복무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나를 주로 글씨 쓰는 차트병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원래 국가에서 부여한 군사 주특기는 포병 계산병이었다. 

지도를 놓고 거리 방향을 계산하고 

대포의 사각과 편각을 계산해서 포대에 알려주는 일이다. 

빠른 계산력이 필요해서 어릴 때 주산 배웠던 친구들이 유리한 부분도 있지만 평소에 포술학에 대한 공부도 꾸준히 요구되는 분야이기도 하다. 

그래서 늘 두꺼운 포술학 교범 6-40을 끼고 살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의 동료들과 호흡이 잘 맞아서 복무시절 3번의 포술경연대회에서 계속 우승했고, 

그때마다 포상휴가를 나와서 다른 분야 동료들로부터 부러움을 받기도 했다. 

그렇듯 나의 군사주특기 번호 133 포병 사격지휘병이었던 군시절은 늘 즐거운 기억이다.

목회자의 성경처럼 내 손에 쥐어있던 포술학교범의 내용이야 

지금은 당연히 지난 세월만큼 가물가물하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부분이 있다.

‘砲身의 追想’ 

무쇠 덩어리 대포가 기억을 한다는 것이 당시에도 놀라웠지만 

지금도 그 이유가 궁금하긴 하다. 

그 내용은 이렇다. 

대포는 추진제로 폭발력이 강한 장약이란 것을 사용하는데 

거리마다 사용하는 양이 다르다. 

물론 표적거리가 멀 때는 장약을 더 많이 쓰게 된다. 

그런데 장약을 많이 넣고 쏘다가 근거리 표적으로 바뀌어 

장약을 줄이면 한동안 이 대포는 같은 계산식으로도 

더 멀리 쏘는 습관을 가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장약의 양을 변경할 때는 그 부분을 미리 계산해 놓아야 한다.

그 이유가 궁금하여 여기저기 다른 교범도 뒤져보았지만 

추가되는 설명은 없었다. 

쇠라는 것도 습관이 생긴다는 것이 무척 신기하기도 하고, 

당시만 해도 말랑말랑한 감성을 가지고 있던 어린 군시절이라 

세상의 추억과 단절된 나와의 동질감을 찾은 기분이 들어 

대포에 대한 애착이 더 깊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기억이 있어온 지 십 수년이 흘러가고 있던 오늘 아침에 

불현듯 스치는 기억이 있어 잠시 멈칫거렸는데 

포신의 추상처럼 내 기억의 추상이 나의 발걸음을 방해했다. 

숨 쉬지 않는 대포의 추상이라는 것도 

포탄의 속도를 좌우할 만큼 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데 

사람의 추상을 그에 비할 수는 없겠지.

다시 발걸음을 시작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 과거라는 것의 혜택이랄까..

지나버린 것을 두고 동동거려봐야 소용없지만 

내 의도에 따라서는 잘 포장할 수도 있다는 생각.. 

비교해 본다면 앞으로의 일은 내가 더욱 어찌할 수 없는 일.

그저 꿈을 꾸고 다가서는 시간을 기다릴 뿐이지만 

과거는 내 맘대로 밝게도 어둡게도 채색할 수 있는 문제 아닌가. 

내가 지내온 시간은 내가 가져버린 물건과 같다. 

내 소유의 물건에 내가 예쁘게 단장을 해줄 수 있듯 

내가 지내온 시간도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미래는 그렇게 못한다. 

완전히 나의 소유가 아니니까..

하지만 과거는 그런 혜택 정도는 남겨주는 아량이 있으리라. 

나의 추상... 

그것은 결국 나의 의지가 전제(專制) 해도 허락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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