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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스푼 Jul 15. 2022

내가 프롤레타리아라니

지 자신을 알라

Sub. Title 내가 프롤레타리아라니


 인터넷 돌아다니면 유명한 짤이 있다. ‘내가 고자라니’

생각지도 못한 현실을 당면한 사람의 충격과 분노와 허탈함이 그 사진만 봐도 내 일처럼 느껴진다. 나도 살면서 비슷한 각성의 순간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했던 말이 이것이다.

‘내가 프롤레타리아라니’

요즘 20대는 프롤레타리아, 부르주아 같은 단어를 잘 모르긴 하던데 전에는 낯선 말도 아니었다. 프롤레타리아는 가난한 사람, 부르주아는 돈 많은 사람 정도로 알고 있던 단어다. 직장을 다니면서 할부지만 차도 사고, 대출을 받았지만 집도 샀던 상황에서 어떤 설문지를 받았다. 생활수준과 만족도에 대한 조사였는데 집에 뭐가 있냐 없냐 물어보는 그런 조사였다. 물음 중에 ‘당신은 중산층입니까?’ 항목이 있었는데 여기서 멈칫했다.

우쭐한 기분으로 ‘예’ 항목에 동그라미를 그리려다 보니까 글자가 중산층이란 것이 그날따라 생소해 보였다.

‘왜? 중상층이라고 않고 중산층이라고 쓰는 거지?’

내가 평균보다 잘 산다는 근거 없는 긍정으로 나는 당연히 중상층 정도는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산층이라고 하니 중상층(中上層)과 중산층(中産層)은 다른 것 같아서 뒤져봤다. 최상층, 최하층이라는 말은 있는데 상산층, 하산층이란 말은 없지 않은가.

무산계급(無産階級), 유산계급(有産階級) 사이에 있는 사람이 중산계급(中産階級)인데 계급이라고 하면 공산주의가 부각되어 보이니 계층이라는 의미로 적당히 물타기 된 말이 중산층이다.

그럼 가운데에 있는 산(産)은 뭐지? 자연스럽게 궁금해졌다.

생산(生産)의 산(産)이다. 그러면 무엇인지 모르지만 중간 정도는 생산해야 중산층이 되는 것 같았다. 유산계급은 뭘 생산하는지 알아야 했다.

그런데, 유산계급이 1이라면 무산계급은 0이니까 뭐든 생산만 하면 중산층이 되어버리는 결과가 된다. 많이 생산하고 적게 생산한다는 의미도 아닌 것 같았다.

결국, 이 말은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으면 유산계급, 없으면 무산계급. 간단해졌다.

그럼 다음으로는 생산수단이 무엇인지 알면 됐다.

생산수단. 위키백과 설명은 이렇다.

 

생산수단(生産手段, 독일어: Produktionsmittel)은 경제학과 사회학에서 생산을 위해 투입되는 물질적, 비인간적 요소이다. 기계, 도구, 공장, 인프라, 자연자본 등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 비인간적 요소라는 부분에 밑줄 쫙, 소름도 쫙.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즉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노동을 해서 뭔가를 생산한다고 생각했는데 비인간적 요소로 제한을 했으니 사람은 생산수단이 아닌 것이다. 나는 생산수단이 아니고 생산수단처럼 나를 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생산수단을 가진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쯤 되면 뭔가 단단히 오해가 있다는 것인데……

어쨌든 나는 생산수단이 없으니까 프롤레타리아다. 중산층이 아니고 무산계급이다. 그런데 왜 내가 중상층, 아니 중산층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을까? 부에 대한 기저효과일까? 70년대의 경험한 사람으로서 먹고살 만한 수준이면 만족을 했을 것 같다는 답이 하나 있고, 단순히 무식이 이유일까? 프롤레타리아, 브르주아, 쁘띠 브르주아라는 말을 잘 몰랐을 것이라는 답이 있고, 또 하나는 세상 물정을 몰랐다는 답이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왠지 세상 물정을 몰랐다는 답에 좀 더 끌린다. 서울은 눈뜨고 코 베이는 곳이라는 것이 다른 말로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눈 뜨고 코 베인다는 것과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사장님들 입장에서는 노동자들이 많아야 임금도 싸고, 해고가 쉬워야 리더십이 강해지고 그러면 생산력이 높아질 것이다. 노동자를 기능적인 면으로만 보면(한마디로, 비인간적으로) 비록 사람이지만 생산수단이 된다. 노동자가 다들 사업을 하겠다고 나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겠지만 사장님들 입장에서 그렇게 되어가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나의 생산수단이 사라지는 것이니까. 그래서 세상에는 다른 사람을 계속 생산수단으로 두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만든 교묘한 장치가 여기저기 숨겨져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쉽게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나를 채용해 준 사장님과 같이 일하는 직장상사는 모두 한없이 좋은 분들인데 나를 계속 생산수단으로 쓰고 싶어서 그런 것이라는 설명이 현재의 상황에 맞는 소리일까? 그렇게 생각하자니 그분들께 죄송한 마음까지 든다.

어쩌면 다들 크게 보면 이 세상의 생산수단에 불과하니 생산수단들끼리 서로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어서 그랬을 것이라 생각한다.

환경이 사람을 지배한다고, 노숙자 흉내 일주일이면 진짜 노숙자 되어버리듯, 그리고 서울역 지하도만 빠져나오면 되는데 개미지옥이라도 되는  마냥 거기서  나오는 것처럼, 생산수단으로 있으면서 그걸 벗어나 생산수단을 가지겠다는 생각으로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다. 요즘 말로 세계관이 다른 것이라  수밖에. 그리고 노숙을 하면서도 다른 노숙인보다   부지런히 줄을 서서 끼니를  때운다면 행복한 노숙인이라   있고 노숙인 사이에서는 중상층이라   있는 것처럼 회사 다니면서 동료보다 연봉을 조금이라도  받으면 중상층이라 안도하고 중산층이라 착각하기까지는 어렵지 않은 의식의 흐름이다.

나만 그렇게 의식이 흘러온 것이 아니다. 내 주변 여러 사람 물어봐도 왜 중산층인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그 말은 다 그렇게 본인의 경제상황과 상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고 매달 주는 월급에 기뻐하고 매달 나가는 카드값에 안타까워하는 대부분의 우리가 아닐까.

이렇게 나의 자리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야 내가 뭐가 부족한 지를 알고 그것을 구하고 싶을 테니까.

나는 각성했다.

나는 중산층이 아니다.

나는 무산계급이다.

나는 생산수단이 없다.

나는 생산수단을 가지고 싶다.

이 정도 각성을 했으니 앞으로 ‘내가 고자라니’ 짤은 웃고 넘길 수 있지만 ‘내가 프롤레타이아라니’라는 생각은 당연히 웃어넘길 수만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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