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일기 번외편
나의 첫 월드컵은 동국이형을 만난 1998년도의 프랑스 월드컵이었다.
새벽 경기 보겠다고 일어났던 고3은 엄마에게 등짝까지 내어주며 그렇게 운명처럼 축구와 만나게 됐다.
그리고 24년이 지난 올해, 한창이었던 중동에서의 월드컵은 그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는 중이며,
그 가운데 우리나라는 12년 만에 '원정 16강'이라는 결과를 내며 경기력까지 완벽했던 너무나 멋진 여정을 이미 마무리 지은 상태다.
중동의 더운 날씨 탓에 최초로 겨울 월드컵이 된 이번 월드컵엔 총 26명의 대한민국 대표선수가 선발됐다.
(예비로 수원삼성의 오현규 선수까지 카타르에 함께 갔다. 비록 그라운드를 밟을 수는 없었지만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본인에게는 아주 큰 경험이 됐을 것이다)
국가대표팀이 지역예선과 최종예선을 거치며 좋은 모습들을 보여주긴 했지만, 사실 월드컵 본선 무대에 관한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던 나였다. 다만 최종 명단이 발표됐을 때 우리 전북 선수들이 너무나 많았기에(26명 중 6명의 선수가 전북현대 소속이다) 혹시 승리는 하지 못하더라도 제발 큰 실수들만은 하지 않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평소 K리그는 보지도 않으면서 4년에 한 번씩만 축구를 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괜한 욕받이가 되는 모습은 너무나 싫었기 때문에...
전 국민의 기대와 약간의 염려 속에 월드컵이 개막됐고, 대한민국은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우루과이-가나와 한 조에 속하게 됐다. 그리고 시작된 조별리그 첫 경기가 우루과이전.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생각하면 개인적으로도 우루과이에 쌓인 게 많았기에, 혹시 다른 두 경기를 지더라도 최소한 우루과이를 상대로는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우루과이를 상대로 한 대한민국의 선발 라인업엔 두 명의 전북현대 선수가 있었다.
좌측 수비수 김진수 선수와 우측 수비수 김문환 선수.
김진수 선수의 선발은 예측 가능한 일이었으나 김문환 선수의 선발은 살짝 의외였다.
오히려 최전방 공격수인 조규성 선수가 선발로 뛰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조규성 선수는 1차전을 벤치에서 출발하게 됐다. 세계 최강의 미드필더진을 자랑한다는 우루과이를 상대로 제발 대등한 경기력만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으로 경기가 시작됐고, 그렇게 시작된 경기는 초반부터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전하지 않을까 싶던 우루과이를 상대로 대한민국 대표팀이 전혀 밀리지 않는 경기를 펼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당황한 듯한 우루과이보다 더 앞서는 경기력이었다. 결과는 아쉬운 0:0 무승부였지만 우리가 이기는 게 어쩌면 당연했을 경기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 멋진 경기에서도 가장 눈에 띈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우리 전북의 김문환 선수.
그 작고 소중한 선수가 우루과이의 공격수들을 커버하다가도, 대한민국의 결정적 공격 기회들까지 꾸준히 만드는 걸 보고 정말이지 거의 기립박수를 쳤다.
(선발을 기대했던 조규성 선수는 후반에 교체 투입되면서 전 세계의 여심을 흔들기 시작했다)
우루과이를 상대로 한 좋은 경기력은 2차전인 가나전을 더욱 기대하게 만들었다.
냉소적인 자세였던 내가 16강 진출에 대한 희망까지 가진 채, 그렇게 약간은 들뜬 마음으로 가나와의 경기가 시작됐다. 가나와의 경기에서도 좋은 경기력은 그대로 이어졌다. 선발로 투입된 조규성 선수는 대한민국 선수로는 최초로 멀티골까지 성공시키기도 했다(그리고 여러모로 '더'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다만, 주심의 석연치 않은 판정과 집중력이 흐트러지며 실점의 빌미를 내주게 낸 부분들은 우루과이와의 경기보다 더 많은 아쉬움을 남기며 결국 2:3 패배라는 결과를 받아 들게 됐다. 이상하게 축구는 우리가 했는데 경기는 가나가 이긴 것 같은......
이로써 16강 진출은 그저 또 남의 일이 되어만 가는 듯했다. 마지막 3차전의 상대인 포르투갈은 속한 조에서 가장 강한 팀일 뿐만 아니라 혹시 우리가 포르투갈을 이겨도 우루과이가 가나를 적은 점수차로 이겨야 우리가 16강에 진출할 수 있는, 그야말로 자력으로는 이제 할 수도 없는 아주 낮은 가능성의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포기하기엔 근래에 더없이 좋은 경기력을 월드컵 본선에서 보여준 대한민국 대표팀이었다.
이제는 모두의 간절함을 담아 본선 마지막 경기인 포르투갈전이 시작됐다.
시작 직후엔 그래도 나름 강팀을 상대로 잘 버티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우린 이미 20년 전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을 이긴 적이 있다, 누구나 알다시피. 그리고 그때 눈물을 흘려야 했던 포르투갈의 수비수가 지금 대한민국 대표팀의 감독이다.
그러니 축구는 끝날 때까지 정말 알 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전반 초반, 5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너무나 무기력한 장면으로 선제 실점을 하고 말았다.. 하... 역시 쉬운 일이 아니야...
이 와중에 눈치도 없는 우루과이는 가나를 상대로 전반에만 두 골을 넣으며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는 중이었고(이제 그만 넣어야 한다고, 이것들아..), 다행히 우리나라는 김영권 선수의 동점골로 다시 팽팽한 균형까지는 맞춘 상태였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후반전, 이제 남은 시간은 45분이 전부다.
부상에서 복귀한 황희찬 선수와 다른 선수들의 교체 투입으로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지만 더 이상 추가골은 터지지 않고 있었고, 그렇게 정규시간도 다 지나 이제 남은 시간은 추가시간뿐.. 가나와 우루과이의 경기에서도 더 이상 추가골은 터지지 않고 있었으며, 남은 시간 동안 만약에 우리나라가 한 골이라도 넣어서 승리를 챙기며 모든 경기가 그렇게 끝이 난다면 꿈에 그리던 16강 진출을 할 수 있게 된다.
추가 시간에 돌입하는 순간, 어찌나 초조하고 떨리던지 더 이상 자리에 앉아서 볼 수만은 없었다.
두 손을 꼭 모으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바로 그 순간, 포르투갈의 코너킥 찬스에서 김문환 선수가 밀어낸 볼을 우리의 주장 손흥민 선수가 그대로 역습 찬스를 살려 질주하더니 문전으로 들어오던 황희찬 선수에게 기가 막힌 패스로 볼을 찔러 주면서 황희찬 선수가 그토록 바라던 역전골을 성공시키는 게 아닌가,
경기장 안으로 달려든 모든 선수들 못지않게 우리 또한 환호로 가득 찼고, 그 뒤로 남은 추가시간을 잘 지켜낸 결과 대한민국은 조별 마지막 경기에서 정말 기적 같은 승리를 챙기게 됐다. 하지만 아직 16강 진출까지는 안심할 수가 없는 일, 우리보다 후반전 킥오프가 늦었던 가나와 우루과이의 경기는 추가시간마저도 우리 경기보다 길었고, 그 시간들이 어찌나 더디게 가는지 정말 무릎을 꿇고 보게 됐다. 결국 가나와 우루과이의 경기도 가나 골키퍼의 신들린 선방과 참신한 시간 끌기(?)등으로 우루과이의 추가 득점 없이 경기가 끝이 나면서, 그렇게 가나 또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의 복수를 함과 동시에 대한민국은 역사적인 원정 16강 진출을 확정 짓게 되는 순간이었다.
국가대표팀의 경기를 보면서 이토록 뭉클하고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16강전에서는 비록 세계 최강의 브라질을 만나 아쉬운 패배를 기록하며 대회를 마감해야 하긴 했지만, 축구대표팀이 이번 월드컵에서 보여준 모습은 충분히 넘치는 축하와 박수를 받을 만큼 멋진 모습들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더 고마운 건 미리 했던 많은 걱정과 달리 우리 전북 선수들이 너무나 잘해줬다는 것.
특히 이번 대회 나의 원픽이었던 김문환 선수는 정말 새로운 발견이었다.
우리 팀에서 1년을 뛰는 동안에도 그저 작고 소중한 선수가 '참 열심히도 뛰는구나'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월드컵에서 4경기 풀타임을 전부 소화하는 동안 세계 최강의 공격수들을 막아내던 모습과 동료들을 생각하며 한 발 더 뛰던 그 모든 움직임들이 정말 감동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우리 전북의 김진수 선수는 대회전부터 온갖 고생을 너무 많이 한 탓에 정상적이지 않았을 컨디션으로도 최선을 다해 경기를 뛰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고, 우리만 알던 '우리의' 조규성 선수는 교체 투입에도 전 세계를 들썩이게 하더니 한국 선수로는 월드컵에서 최초로 멀티골까지 집어넣으며 '모두의' 조규성이 되어 돌아왔다.
또, 이름만 들어도 그저 애잔한 우리의 부주장 백승호 선수, 정말 한 경기도 못 뛰고 오면 어쩌나 하고 마음을 졸였었는데 브라질을 상대로 그렇게나 멋진 득점을 만들어 내다니.. 정말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뭉클한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비록 경기는 못 뛰었지만 월드컵이라는 대회를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큰 자산이 됐을 우리의 송범근, 송민규 선수에게도 많은 박수를 쳐주고 싶다.
그리고 우리들의 축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축구는 어쩌면 4년에 한 번씩 오는 축제일 수 있겠지만,
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시 시작될 무렵이면 우리들의 일상엔 언제나처럼 여전히 함께 할 것이며, 또다시 선수들의 숨소리와 팬들의 함성이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벌써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올 봄을 기다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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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사진 출처-카타르월드컵 'DAUM' 이미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