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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uu Nov 27. 2021

노묘의 시간

4화. 나도 고양이처럼 대우해줘.

 고양이와 함께 살게 되었을 당시는 신혼 초기의 빠듯함으로부터는 한숨 돌린, 나름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한 시점이었다. 허영은 고사하고 둘 다 씀씀이도 크지 않은데 결혼 초에는 둘이 벌어도 적자를 간신히 모면하는 수준이었다. 남편은 홀어머니, 나는 아버지에게 각각 매달 생활비를 드리고 있었고 결혼했다고 그 돈을 끊을 수도 줄일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는 사람 입장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 하기 좋은 남 얘기로 애도 못 낳고 부모부양이라니...라며 한숨짓는 주변인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원래 나도 남편도 자녀계획은 없었으니 그런 상황이 별로 애달프거나 한숨 쉬어지지는 않았다. 나이도 들고 직업 안에서의 안정감이 생기면서 경제적으로도 조금 여유가 생겼을 시점에야 고양이와 함께 살 기회가 온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물론 여유래봤자 간신히 습식사료나 좋은 기능성 간식 사는데 큰 고민이 없는 정도이지 한 번씩 병원이라도 갈 때면 '어이쿠'하는 신음이 새어 나오는... 여전한 수준이었다.

  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느끼는 감정이겠지만 과거 기준으로 보면 뭔가 딱히 잘 못해주고 있지 않아도 늘 미안하다. 원래 태어난 본성의 고양이답게 살아야 했을 아이들에게 나와 함께 살자고 고초를 겪게 했을 때(중성화 수술)는 마음이 무너질 것처럼 미안했다. 특히 반나절에 기운 차리고 캔 하나에 마음을 열어준 노랑이와 달리 3일 내내 기운 없이 늘어져있던 까망이의 중성화는 13년 넘는 기간 단 한 번도 고양이 입양이란 사건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던 내게, 돌아보면 제일 큰 고비였다. 안 보이는 곳에 숨어 들어간 까망이를 억지로 끌어내서 안고 한참 운 기억이 난다.  미안하고 미안했다. 네가 잃어버린 것 대신 나는 평생 안전하고 따뜻하고 쾌적하게 해 줄게. 행복까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네가 괴롭지 않도록 지켜줄게.... 그런 다짐을 하면서. 허나 그것도 지금 와 돌아보니 미욱한 집사 놈의 자기 연민일 뿐이었다. 고양이에게는 혼자 고요하게 있고 싶을 뿐이었는데 눈치도 없이 자기 넋두리하느라 아픈 아이를 귀찮게 한 것일 뿐이다. 그 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내가 필요한 물건은 열 번 생각하고 사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면 바로 사는 삶이 시작되었다. 원래 공감능력이 좋은 남편은 나보다 더 애틋했다.


  그런 우리의 마음 씀씀이에 부러운 마음을 넘어 시기 질투의 감정을 드러낸 첫 번째는 아버지였다. 고령이다 보니 격일로 한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안부전화를 하는데 규칙적인 전화가 다 그렇듯 대화거리는 한정적이다. 날씨가 추워졌으니 감기 조심하셔라, 환기는 자주 하는지, 집에만 있지 말고 산책이라도 꼭 나가야 한다 등 매일 돌려 막는 대화 주제에 질린 나는 어느 날 진심으로 마음에 있는 말을 건네고 싶었던 것 같다. 한두 번 고양이들의 안부를 알려주던 어느 날 아버지는 전화 너머 정색을 하고 있었다.

  "내가 고양이만도 못한 것 같으니, 그놈의 고양이 얘기하지 마라."

  어이가 없어 뭐라 대꾸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노인이 되면 애가 된다더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하는 안쓰러운 마음, 한편으로 아버지는 이런 진심 담긴 일상의 대화는 나눌 수 없는 사람이구나... 씁쓸한 생각이 교차했다. 사실 시어머니와는 이런 조심스러운 감정에 대해서도 농담조로 주고받아왔다. 결혼 초부터 어쩌다 보니 큰 형님댁의 가정사로 어머니가 아주버님네 아이들까지 맡아 키우는 상황, 그런데도 어머니 집의 생활비는 둘째인 내 남편이 감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늘 어머니는 우리에게 미안해하셨다. 그러시지 말라고, 조카들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 드리는 건데 그건 당연한 것이라고, 사정되는 쪽이 좀 더 하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시라 했으나 만나면 미안하단 말씀을 입에 달고 사셨다. 결국 듣다못해 "어머니는 우리 결혼에 투자금도 있으시니 이자 받으시는 셈 치고 당당하게 받으시지요" 그리 말했다. 사실이 그랬다. 성인 두 사람 결혼에 부모가 꼭 뭔가 해줘야 하는 것도 아니니 탓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이, 내 결혼에서 나는 부모님 도움 없이 홀로 해치운데 비해 남편은 어머니로부터 우리 전세자금의 절반 가까이 도움받았다.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보살핌 받은 기간보다 더 긴 시간 아버지를 부양하고 있는 것과 대비해 생각하자면 젊은 날부터 청상으로 아들 둘 열심히 키운, 더구나 전세자금의 절반이나 댄 시어머니 부양이야 생색 낼 일도 아니다. 서로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는 사이에서 시어머니는 자식 계획 없는 둘째 내외의 유별남에 한 번도 정식 태클을 거신 적은 없었지만, 방문할 때마다 고양이가 생활의 중심이 되어가는 집 모양새에 불편한 기색이 전혀 없기는 어려웠다. 늦게라도 이제 내 용돈 그만 주고 애 하나 낳아 기르면 안 될까 하는 말씀도 직접은 아니지만 에둘러하신다. 재주도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 늘 돈 안 되는 취미로 공사다망한 아들, 다 늙어서도 아직까지 흥미와 재미에만 반응해 움직이는 며느리, 한숨이 나오실 만하다.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놈은 매번 어머니에게 "우리 집에 고양이들 보러 갑시다" 하고 어머니는 슬쩍 눈을 흘기신다.

  마지막으로 엄마가 등장할 차례다. 가장 친하고 격의 없는 만큼 세상없이 친한 모녀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하드보일드 한 대화가 이뤄지는 사이가 딸과 엄마 사이. 내 경우에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보다 엄마가 훨씬 먼 대상이었다. 아버지라는 대상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해지면서부터는 힘든 사람과 사느라 고생한 여성으로서의 엄마에 대한 애틋한 마음, 결국 이혼은 피하지 못했지만 어느 시점까지는 가정을 지키려고 한 노력에 대한 고마움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내내 기억하는 엄마는 짜증 많고, 자기 자신 외의 존재에 무관심하고, 예측 불가능한 화를 주체 못 해 가끔은 자식, 특히 아들인 동생에게 부당하게 폭발하는... 전형적으로 남편에게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 불안정한 여성이었다. 힘든 가정사를 극복하고 본인의 경제적 자유를 되찾기까지 엄마는 나나 동생 모두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게 나는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버지 한 사람을 부양하는 것도 어려운데 엄마라도 생활력 있게 본인 앞가림을 할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래도 명절, 어버이날, 생신 같은 명분 있는 날들 만나고, 반갑게 안부 묻고, 맛있는 밥도 먹고, 그렇게 보통사람들처럼 지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엄마는 슬슬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쇼핑에는 취미도 없는 나와 남편을 굳이 본인이 가자고 해서 간 백화점, 고양이 집사들이 그렇듯, 자동반사처럼 고양이가 그려진 커피잔, 접시 같은 소품을 구경하고 있는데 아무 일면식도 없는 점원에게 너스레를 떨고 있는 게 아닌가. 애는 안 낳고 고양이만 끼고 살겠다니 저게 대체 말이 되느냐는 식의 대화가 어떻게 단 몇 초 만에 이뤄질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 하는 거예요? 생판 남한테?"
  "다른 사람들은 자식 자랑 손자 자랑하는데... 나는 무슨 재미로 사나 싶어서 그래.  
  "가족이 엄마 자랑하려고 있는 건가? 희한한 소리 할 거면 이만 들어갑시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넌 왜 그렇게 까칠하니? 엄마가 못 할 말 했나."
  "옛날에는 더 까칠했는데 그땐 엄마랑 말 자체를 별로 안 했던 거예요. 엄마 아버지 싸우는 거만 보고 컸는데 뭐 좋은 본을 봤다고 내가 좋은 부모 되겠어? 안 낳는 게 그 자식 도와주는거지."

 그날의 충격요법 이후로 엄마는 더 이상 사위 앞에서만큼은 그런 무례하고 무심한 대화를 늘어놓지는 않는다. 대신 집에만 오면 우리 고양이들을 트집잡았다. 유튜브에 나오는 고양이들은 애교도 많던데 너네 고양이들은 왜 이렇게 내다보지도 않냐, 나이가 많아 그런가 배는 왜 그렇게 늘어졌냐, 먹고 자기만 하냐 등등 하는 말마다 내 새끼들을 험담하는 것이 아닌가.

  "얘들이 고양이 연배로 엄마보다 위예요. 개도 아니고 고양이가 무슨 꼬리 흔드는 동물인줄 아슈? 그리고 엄마 배 늘어지는건 게을러 그런건가? 이건 늙어서가 아니고 고양이 종특, 소중한 내장기관을 보호하는 장치라고요."

  "딸이라고 하나 있는게 말도 참 표독스러워. 엄마가 고양이만도 못하냐?"

  "아버지하고 똑같은 소리...고양이하고 엄마하고 한 줄에 세우고 싶어요? 한심하게."

  

  중년의 전투력 만랩의 딸을 어린 시절처럼 말없이 과묵하게 들어주는 딸로 알고 잘못 건드렸다가 매번 본전도 못찾은 노년의 엄마는,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고양이들 영상에 빠져 있다. 노년의 아가들이 변비로 고생하거나 눈물이 많아지면 허피스를 걱정하듯 당연히 노년의 부모가 제대로 챙겨드시는지, 주변 질나쁜 친구에게 사기를 당하지는 않는지, 집에 고장난 것은 없는지 걱정하고 살피는데도 부모들은 -분명 아닌 줄 알면서도-자신보다 자식들에게 한층 물리적으로 가까운 고양이에게 자신의 입지를 대비하여 스스로 비참한 기분을 자초하곤 한다. 고양이 vs 부모 갈등이라 명명하지만 기실 고양이는 그 갈등의 당사자도 원인제공도 한 바 없다.


  실제 미국에서도 이 비슷한 사회상을 반영한 리서치 결과가 있었다. 미국노인들 중 상당수가 가족 안에서 본인의 중요도가 개보다 훨씬 아래에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개가 아프면 온 가족이 걱정하지만 자신이 아픈 것은 늘 당연한 일이어서 그런 것이라고 머리는 이해했지만 심정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어쩌겠는가. 초고령화 사회의 전형적인 문제를 안고 사는 나는, 고양이들의 노화와 쇠약, 죽음에 대해서 걱정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내 돌봄을 필요로 하는 부모세대의 남은 여생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인간의 시간과 다르게 흐르는 고양이의 시간은 길어봤자 20여년. 이제 허투루 보낼 시간이 없다. 같은 인간 시간의 파동 안에 있는 부모에게 쓰는 마음 종류는 또 다른 것이다. 아쉬움과 애닯음을 동반한 감정도 함께 받고 싶다면 고양이의 시간만큼 밀도있게 단축하셔야 한다.

  고양이들은 부모들의 질투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말없이 평화롭게 뒹굴거린다. '언어'는 여러 면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수단이기보다 갈등을 부추기는 매개체인것 같다. 말 한마디 않고도 아가들은 나에게 오만가지 필요한 감정과 기능적 의사를 전할 뿐 아니라 내게 필요한 '위로와 웃음'도 준다. 평안해라, 아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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