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기후 위기와 인간문명 쇠락의 시작 지점에 서서.
고양이들의 기원은 문명의 기원지와 같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보았을 것이다. 농경과 잉여식량, 그리고 쥐. 고양잇과 동물은 전 세계 어디에나 있었을 텐데, 왜 가장 먼저 인간과 연을 맺고 절반정도는 사람 손에 운명의 포트폴리오를 맡긴 고양이들의 존재를 제일 빨리 기록한 지역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 이집트 일대였을까.
지금이야 정치 사회적 결과인지 기후변화의 결과인지 몰라도 이집트는 세계 최대 곡물 수입국, 하지만 인류 문화사의 초기에는 이집트야말로 나일강의 주기적 범람의 혜택으로 빵과 맥주의 기원이 될 수 있었다.
부연 : 이집트인들이 ”고양이 러버“였다는 점은 고양이와 함께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딱히 교양이랄 것도 없는 기초상식 수준이다. 바세트 여신이 고양이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수다스럽기 그지없는 이집트 문명권이 남긴 수많은 기록들이 고양이에 대한 생활 속 결합과 애정을 과시하고 있는 것도, 다 우연이 아니란 뜻이다.
한편, 우리나라에 고양이가 전래된 기원도 혜초의 불경이 들어오면서 그 바닷길에 선원들과 함께 들어온 고양이들이 로컬화되었다며 코숏의 기원을 외래로 보는데 사실 누가 알겠는가. 아비시니앙과 같은 이집트, 아프리카 대륙출신 고양이들과 코숏들간의 종적 특징은 고양이와 고양이 간 개묘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더위보다는 추위에 훨씬 취약한 고양이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면 이 녀석들의 조상이 더운 대륙 출신이었던 것은 어쩌면 진짜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멋진 털코트는 입었으나 한반도의 겨울은 고양이들에게 정말 혹독한 계절. 고양이들의 귀를 관찰해 보면 길고양이들의 경우 귀의 안쪽까지 빡빡하게 솜털이 가득한데 집고양이들의 경우 대부분 성글성글한 눈 옆 관자놀이 부분과 바깥쪽에만 뒤덮이고 안쪽은 깨끗한 피부상태로 드러난 채다. 우리 집에 계신 두 묘르신들도 마찬가지. 추위보다는 온도 조절 등을 위해 귀와 여러 부분에서 온도조절을 할 수단을 갖춘 것이다. 하긴 이 더위에도 가끔은 찜통 같은 베란다에서 햇살을 쬐고 들어오는 두 냥님들을 보며 열사병이라도 걸릴까 조바심이 나니까.
이 대단한 폭염, 열기가 사실은 앞으로 맞이할 여름들 중 가장 시원한 여름이라니, 재작년까지 에어컨을 켜지 않고 여름을 나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점점 올라가는 열기에 대한 정보가 주는 함정인지 모르겠지만 더 습하고, 더 덥고, 더 심각한 폭우와 바람이 따라오고 있다는 공포감이 올라간다. 점점 덥다는 말로는 부족한 극악한 기후의 공포가 우리 삶을 지배할 것이다. 곡물 중심의 문화, 풍요의 시작지점에서 우리를 찾아왔던 고양이는 인류 문명의 쇠락과 함께 어떻게 될까? 안네프랑크의 일기를 애플에서 새롭게 해석하여 만든 네덜란드 협력자들 관점의 드라마를 보면 구체적 실마리를 제공받을 수 있다.
숨어 지내는 은닉처에서는 숨소리조차 죽여야 할 때가 있다. 식량은 당연히 부족하다. 공간 또한 부족해서 사람들은 가족, 친구임에도 그 사실을 잊고 가끔 미친 듯 짜증을 낸다. 그런 공간에 염색체가 다른 존재, 동물은 개든, 고양이든, 심지어 다른 성씨를 가진 외부인은 친구라도 함께 할 수 없다. 안네는 자신의 고양이를 포기해야 했고 그 고양이는 길을 헤매다 아마 안네보다 먼저 죽었을 것이다.
고양이들, 다시 말해 “최소한의 인간성”을 부양할 수 없는 날들을 상상해보곤 한다. 현재 식량자급률 25% 수준의, 가진 것 없는 자원빈국이지만 제조업 강국 대한민국이 공산품을 수없이 팔고도 식량을 전만큼 쉽게 수입할 수 없어 굶주리는, 아니 그보다는 좀 더 온건하게 풍요롭지 못한 수준의 날들을 맞이할 것이다. 점점 시간이 갈수록 풍요롭던 땅들도 자기 국민 먼저 먹여야 하므로 수출을 줄일 것이다. 그럼 제일 먼저 프랑스산 로열캐닌 기능성 사료들은 수입할 수 없게 되겠지. 가장 아쉬울 것은 커피다. 고산지대 시원한 땅에서 수확해야 하는 원두는 열기 가득한 지구에서 점점 희귀한 자원이 될 것이므로. 키워도 푹푹 썩어나가거나 수확할 수 없는 수준으로 생산성이 쪼그라드는. 고온 미적응 작물들이 늘어난다. 인터스텔라의 지구가 보여주었듯이 옥수수정도가 밀집하고 덥고 물 부족한 땅에서 자라는 거의 유일한 식물이 될 수도 있다. 먹기 위해 키우는 가축이라 해도 키우는 과정에서 고통을 증가시키고자 하는 인간은 없지만 키우는 비용이 훨씬 늘어나게 되면 점점 동물들의 고통은 늘어날 것이다. 폭염에 아파트형 닭장은 폐사사고를 거듭할 수 있고 더위와 습기에 항생제는 더 자주 맞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생명의 단백질을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은 고통을 증가시키고 그 사이에서 생산성을 조금이라도 쥐어짜기 위해 노력을 멈출 수 없다.
쪽방 거주자들이 보도나 세상의 관심조차 받지 못한 채 죽어나가고, -지금보다는 그래도 쪼금 괜찮은 정부가 들어서 노동법 개악을 막아 옥천버뮤다나 물류센터의 극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지 않는다면- 점점 인도 문화권의 폐습, 육체노동을 혐오하는 문화가 지배하게 될 것이다. 노동을 존중해야 하고 땀 흘리는 근면이야말로 우리 문명의 최후 보루라 추어주던 위선의 가면조차 쓰지 않겠다는 식의 뻔뻔한 위정자가 계속되면 60-70년대에 쌓인 우리의 생산적 진취적 노동기치, 문화는 사라지고 학벌카르텔과 육체노동 천시의 퇴행적이고 후진적인 기치가 지배하게 될 것이다. 단죄의 시간은 훨씬 성큼성큼 빠르게 다가올 것이다.
반려동물을 기르는 데도 꽤 많은 자원이 필요하다. 인류문명 잉여와 문화가 시작할 때 우리 곁으로 슬그머니 스며들어온 고양이들. 앞으로도 이들과 함께 사는 것이 부의 상징이나 특정 신분사회의 전유물이 되지 않기 위해, 또는 부도덕함과 인류애 없음으로 매도당하지 않기 위해. 동물을 위해 마음 쓰는 것이 미안하지 않을 수 있게 모래를 배송해 주는 택배노동자들에게 충분한 수고의 대가가 지급될 수 있어야 하고 나르는 물건의 하중 상한은 앞으로 줄어들던가 기술혁명을 통해 근육통으로부터 해방될 길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헛짓거리 하느라 사용되는 자원들을 제대로 배분하고 집행할 권력만 있다면 지구온도를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올리는데 이렇게까지 가속을 붙이지는 않아도 될 텐데.
함께 불편을 감수하자고, 함께 생산-제조-유통-폐기 수거-재활용의 전체 사이클을 큰 거시적 관점에서 손을 대보자고,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시원찮을 판에
존재하지도 않는 카르텔을 향해 선전포고 하고
존재하는 부정은 입 닫고 귀 닫고 분노조차 하지 않는다.
이 대가는 잘못한 사람들만 지지 않는다. 무작위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랜덤 하게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이 두렵고 무섭고 억울할 따름.
우리 묘르신들에게 10년 후에도 사료와 간식을 줄 수 있을까.
지금 이 시기에 대해 인간 문명 쇠락이자 말세인 줄 알았지만 다시 르네상스로 도약했던 medievil(중세)처럼 평가하게 될까, 진짜 문명의 쇠락 시작점일까.
The end of this epis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