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못 봐서 녹아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를 달리게 한 절반은 그것이었으니까 정말일지도 모른다. 암흑으로 들어가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상태에서 머무르는 경험은 생각보다 더 강하게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바닥에 붙어있는 동안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 순 없기에, 그 도피의 시간이 통으로 날아간 아득함이 온통 나를 지배했다. 자유로울 수 없으니 고민할 수도 없었다. 한 자리에서 굳어 거꾸로 박혀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어디로 갔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발은 걷는데 손과 머리와 마음이 동행하고 있기는 한 걸까. 겨울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나는 명령을 받아도 계속해서 뚝딱이는 로봇이 된 것만 같다.
무언가에 빠져있는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무언가를 좋아할 때도, 누군가를 사랑할 때도 그럴까? 하고 싶은 것이 넘쳐나 하루를 꼬박 쓰고도 시간이 간 걸 느끼지 못할 때, 애정의 열기에 취해서 허둥대다 그냥 쓰러지고 말았을 때가 그립다.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무감각한 나를 마주할 때다.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을 잃어버린 나를 넘어서, 누워만 있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진 것을 발견했을 때 어떻게 다시 길에 올라야 할지 여전히 모르겠다.
과거에는 명목적인 말들에 기댈 때도 있었다.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내세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자유로워지세요. 인생을 즐기세요, 카르페디엠! 슬프게도 이제는 잘 와닿지가 않는다. 기념일도 생일도 내 것 같지가 않다. 자기 계발서에서 말하는 성공하는 방법도, 그들이 새벽 4시 반부터 일어나 갓생을 살 수 있었던 동기도 먼 허상처럼 느껴진다. 언제 내가 가장 열정적이었는지 회상하다 잠드는 날이 많다.
그래서 마지막 칼을 빼들었다. 닳도록 본 것들을 또 끌고 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에게 기댈 곳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그 구석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10월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다시 보았고 11월엔 이방인을 읽는다. 인간실격을 필사하며 그 기행 속에 녹아들었을 삶을 일으키려는 의지를 이해하려 해 봤고, 밤의 사색을 읽으며 낮의 지하철에서 필사적으로 고요해지려 노력했다. 가라앉아라, 혼란이여. 이 작은 화면 속에 모든 의지가 투영되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시간을 죽인다. 진정 얻고 싶은 것은 정말 간절할 때 오는 것일까? 그렇다면 세상에게 배신감이 들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간절할 때 내게 와준 행운이 없다. 그렇지만 행복을 두고 저울질하고 싶지 않기에 그 거짓말을 또 한 번 바보같이 믿어야겠다.
'모든 것을 알아도 생을 사는 이유는 살아야지만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살아야지만 당신을 보기 때문이다. 당신의 말을 당신의 입으로부터 듣고 싶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삶을 바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상반기에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을 읽으며 사는 이유에 대해, 무형 예술에 대해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모순을 두 번 읽으며 사랑과 선택에 대해 고민했던 날, 그날 떠오르는 생각을 시로 적었는데 미친 듯이 마음에 들어 인생은 역시 저지르는 것이라 떠들고 다녔던 추억도 있다. 파벨만스를 보고 반짝이는 눈동자에 대해 적다가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질 뻔한 날도 생각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심코 떠들기는 참 잘한다. 후회와 반성의 반복, 이 굴레가 어쩌면 모든 문제의 시작 아닐까? 또 생각이 너무 멀리 가고 있다. 내 글은 늘 이렇게 우왕좌왕하다 애매하게 결론도 짓지 못하고 끝나버린다. 왔다 갔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주인을 쏙 빼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