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브 Dec 20. 2023

모든 것은 내 안에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외면한 것들

근본적 결여로서 채워질 수 없는 욕망. 이것만큼이나 마음의 공허를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채워도 채워도 흘러내리는 구멍 난 항아리처럼 마음은 좀처럼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을 낳는다. 인간은 거부하지 못한 채 행동과 마음의 괴리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반복되는 일련의 감정 구조 속에서 둥둥 떠다닌다. 나는 그 중심에 사유와 몽상이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같이 스스로를 몽상가라고 지칭하곤 했다. 현실에서 이뤄질 수 없는 동화 같은 만남, 지금 상황에선 절대 얻을 리 없는 엄청난 명예, 그리고 타인에게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곤 하는 마법을 상상했다. 감명의 깊이가 50밖에 되지 않는데도 100만큼이나 황홀했던 것처럼 이것저것 말하고 다녔고, 허무맹랑한 열정을 발휘하며 일의 우선순위를 이성적으로 판별하는데 어려움을 겪은 적도 있다. 생각이 많다는 것을 핑계로 나의 이야기를 쓰는 일에만 몰두하여 타인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기도 하였다. 이 모든 불찰이 결국에는 마음의 괴리로 드러났다. 반드시 시간이 지나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성장에 대한, 감상에 대한 허무함들이 한꺼번에 다가와 지나온 삶 전체에 대한 회피를 불러일으키기도, 주저앉아 체념하기를 택하도록 유혹하기도 하였다. 과연 나는 무엇을 해야 옳았을까?      


주변인들이 열심히 달리는 것에 허무함을 느낀 적이 많다. 부지런히 읽고 쓰는 한 언니를 보며 어떻게 일상 속에서 저 현인들과 함께 달릴 수 있는 걸까 싶었으나 묻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삭혔던 기억도 있다. 비교는 악인데, 비교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 그것을 인지한 후로는 열등감과 자기 괴리의 늪에 빠져들기 일쑤였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 ‘훌륭함’까지 도달하는 길에서 조금 느린 나는 너무 많은 토끼를 만났다. 


이 결여를 채우려고만 했다는 것, 어떻게 해도 채워지지 않던 욕망들이 나를 부푼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크게 보이고 싶다는 마음은 사실 비겁한 사람의 일이어서, 조금은 과민해지고 나서야 바람기를 뺄 수 있었다. 여전히 삐져나오는 날 것의 감정에 허우적대고 있지만, 욕망은 삶 전체를 보아도 결국 온전히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다 채울 수 없다면, 채우는 일 자체에 주목해 보자고 마음을 고쳐먹은 게 계기가 되었다. 끊임없이 보고 듣고 비우고 채우다 보면 내 것이 되어있을 만한 것들이 사실 주위에 많았는데,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생각이든, 사람이든, 나에게 있어 소중한 자원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게 황홀한 클라이맥스를 상상하기보다 길을 산책하는 일상 자체를 사랑하게 되었다. 지금이 그럭저럭 나쁘지 않아서 움직이지 말자고 생각하는 날이 여전히 많지만, 현실의 나에게 안주하며 더 나서지 못하는 나에 대해 마음의 공허를 느끼는 것보다 날씨 좋은 날 새로운 풍경을 발견하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현기증, 그것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현기증은 우리 발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흘리는 공허의 목소리, 나중에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는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가벼운 추락은 가벼운 현기증을 낳는다. 유혹의 발걸음이 나를 이끌 때, 세계는 뒤집혔다. 알지 못하는 것을 알아갈 때, 경험해보지 못한 짜릿함을 느낀다. 가보지 못함에 좌절하며 최고치에 도달한 사람을 동경하기만 하다 사실은 내 안에 그 모든 사유의 시작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날아갈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얻고 싶은 것은 모두 내 안에 있었다는 가벼운 사실이 나를 정말 가볍게 만든다. 명제는 결국 명명함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어지럽고 현기증이 나는 고양 상태를 나는 즐긴다. 사람들은 공허가 내린 현기증의 동아줄을 버리겠지만, 나는 기꺼이 잡았다. ‘자제해도 어쩔 수 없는’ 추락의 욕망에 기꺼이 발을 들인다. 추락하나 두렵지 않다. 떨어지며 깊게 찢기지 않으며 자아는 아직 이성을 잃지는 않았음을 안다. 세상이 허무한 성공의 동아줄로 나를 유혹할지라도 이 줄만 있다면 조용히 그리고 영원히 추락의 실패를 택하겠다. 그렇게 가슴에게 매번 져주며 현재를 희생하는 쪽으로는 눈을 돌리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또 다짐한다. 문득, 철저히 현실을 살고 싶은 나는 결국 몽상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부로 나를 현실을 밀어내며 현실을 살고자 하는, 복잡한 자아를 가지고 이상한 생각들만 늘어놓는, 부산스럽고 혼망아적인 글을 써내지만 속은 미치도록 고요한, 그런 느린 몽상가로 새롭게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영혼은 꼬불꼬불 얽힌 길. 영혼의 언어를 익혀라.(헤르만 헤세, 밤의 사색) 영혼의 언어를 익히는 일은 두렵고도 험한 길이다. 더군다나 꼬불꼬불 얽힌 길이라니, 가보지 않아도 날카로움이 느껴지는 고행길이다. 그러나 영혼의 언어를 익히고, 나를 알아가고, 사회 속에서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사유하기 위해서 반드시 영혼의 길에 발을 들이는 일은 필요하다. 길이 험하면, 발을 꽁꽁 싸매면 된다. 길이 꼬불꼬불하다면, 적절한 타이밍에 방향 조절을 해 편안한 순례길을 만들어내면 그만이다. 정직하지만 무디지 않게, 굳세지만 미련하지는 않게, 바보같이 순수하게 사랑하지만 나를 잃지는 않도록, 그렇게 지켜나간 모든 것이 길 끝의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바위는 아무리 바람과 파도에 깎여도 눈에 보일 정도로 금세 변하지는 않는다. 그저 시간이 지나 그것의 전체 외형이 서서히 바뀌어왔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느림의 미학을 믿는 나는 그저 잠자코 기다리며 어느 순간 눈에 들어올 전경을 그려보기로 한다. 마모된 성숙이 부디 둥글게 빚어져 모난 곳이 없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테레자처럼 살고자 한다. 가볍게, 현기증 나게, 삶에 대한 모토를 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사유하며, 무겁지 않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다.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경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나에게 우연은 우연적이라 낭만적이고,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라 낭만적이다. 그런데 우연을 경험하는 건 나인데, 진정 삶을 하나의 악보로 구성하고 싶어 하는 주체도 나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욕망하는 자와 형성하는 자가 같다. 이 같은 설렘과 즐거움이 과연 우연과 삶 말고 또 어디 있을까? 이제 모든 우연한 사건을 인생의 악보에 새기는 일만 남은 것이다. 테마를 변화시켜 변주하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멜로디는 삭제하고 새로운 것으로 채워도 되며, 언제든지 찢어버리고 새로운 악보를 꺼내 들기로 결심할 수도 있다. 광활한 우주에서 낭만을 믿는 것이 바보 같아 보일지라도, 여전히 그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나는 낭만을 믿고, 사랑을 믿고, 우주적 먼지인 인간의 인간성을 믿는다. 사색하며 감정을 익히고, 터져 나올 듯한 밑바닥의 욕망을 표현하는 데 있어 느린 몽상가로서의 삶은 나름 만족스럽다. 언제든 표출할 구멍이 있다는 믿음은 조금 더 사람을 자유롭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한창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을 때, 시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자들이 쓰는 거라는데 귀퉁이에 떨궈져 있던 나의 영혼을 보면 맞는 것도 같다고 썼었다. 늘 외로움은 내 식사였고, 체기는 굴러간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귀퉁이가 좋다. 충만하게 들어찬 욕망과 삶의 부피를 여전히 갈망하나, 정중앙에 들어찬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꾸준하고도 확실하게 나의 악보를 지지해 줄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 현기증 나는 삶을 꿈꾼다.

작가의 이전글 스스로 찾아야 하는 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