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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트 Nov 12. 2023

That's how it works

모든 일들은 하나 둘 지나가고 삶은 징검다리처럼 이어졌다.

무책임한 하루가 지나갔다.

통장잔고도 일일권장 칼로리도 타인을 위한 배려도 하지 않았다.

하늘이 청명한 점심에 나갔건만, 입동을 겪은 바람은 내 피부를 스치고 머리칼을 헝클어버리며 온몸으로 겨울이 왔음을, 그래서 너무나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간 나에게 어디 한번 버텨보라 채찍질을 하는 것 같았다.


생각이 많고 공상하기 좋아하는 나지만 이런 날은 온몸과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 무게는 사고회로를 짓눌러 그 어떤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 나를 몰아세운다.

도저히 집 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똑같은 Scene과 향이 이어지는 공간에 나를 두고 있으면 이대로 나의 모든 감각이 돌이킬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질 것만 같았다.


언제나 나를 구하는 것은 나다.

회로를 돌리기 거부하는 머리를 대신해 손가락으로 휴대폰앱을 이리저리 건너뛰어가며 낯선 곳으로의 짧은 여정이 될 코스를 만들었다.


한 브랜드의 50주년 전시회에 갔다. 지도앱으로 확인해 보니 집에서 전시장까지 이어지는 도로들은 온통 빨간색으로 답답하게 채워져 있었다. 굳이 여길 가야 하나라는 생각이 몇 번이나 나를 주저앉히려 했지만 기어코 가방에 노트북과 책 한 권을 쑤셔 넣고 집 밖을 나섰다. 

그렇게 택시를 타고도 한 시간 남짓 걸려 도착했지만 입구를 찾지 못해 주위 건물들을 한 두 바퀴 어슬렁거린 뒤에야 전시장을 들어설 수 있었다. 짝짝이 방문한 사람들을 살펴보니 은근히 남자들끼리 온 경우가 꽤 보였다. 여자들끼리 온 경우보다 더 많이 보였는데 이색적인 광경이었다. 전시장 곳곳에는 훤칠한 키에 곱디곱게 단장을 한 남자들이 각 자리에서 자기 구역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몇몇은 꽤나 열띤  자세로 자신에게 맡겨진 상품들을 설명하고, 몇몇은 본인들이 지원했을 것이건만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뜬금없이 이들은 얼마를 받고 이곳에 있는 것일까 궁금했다. 


가는 데 1시간이 걸렸는데 전시를 돌아보는 데는 40분이 걸렸다. 마음에 드는 굿즈도 있었지만 싸지 않은 가격에도 Sold out이 되어있었다. 그래도 차선책으로나마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샀으니, 무계획으로 나선 길이었지만 이 날을 기억할 토템이 생긴 기분이었었다. 전시장을 나와 밖을 보니 어스름하니 하루가 저물어갔지만 집과 반대방향으로 30분은 더 가야 하는 행선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버스를 타는데 오래간만에 일상의 루트를 벗어난 곳에서 버스를 타니 창 밖으로 지나는 풍경은 낯설고도 익숙했다. 대부분의 길은 나에게 낯설다. 이럴 땐 반가워해야 할지, 숙연해져야 할지.


그렇게 향한 다음 행선지는 이미 찬 바람과 인파에 기운이 살짝 빠진 나에게 큰 기대감을 가지게 할 그 어떤 동력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차분하고 조용한, 대부분의 자리가 이미 차 있었지만 나 하나 앉혀줄 자리가 있었던 카페는 의외의 신선함과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언젠가 내 서재를 꾸민다면 나는 어둑하고 긴 지지대의 조명에 검정과 메탈 프레임이 어우리는 책상을 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떤 의자가 안락하고 편안하면서 그 서재와 어울릴지는 도통 아직도 감이 오지 않지만. 그 컨셉과 닮아 있는 카페여서 언제 한번 가봐야지 가봐야지 했던 곳인데 한 해가 거의 저물어갈 즈음에야 방문해 볼 수 있었다. 각자 자리에 앉아 빨려 들어갈 듯 노트북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거나 어떤 사람은 인강을 보고 있었고, 어떤 이는 사진을 찍고 있었고, 어느 연인은 마주 보고 둘만의 이야기를 속삭였다.


자리에 앉으니 이런 딱딱한 철제 의자가 이런 분위기에는 어울리겠지만 내 서재에 두지는 말아야겠다 생각이 번뜩 들었다. 따뜻한 바닐라빈라테와 초콜릿칩 휘낭시에는 그렇게 인상 깊은 맛은 아니었지만 이 공간을 기억할 또 하나의 매개체가 되어 나에게 그 나름의 의미가 되어 주었다.

벽에 걸린 짧은 문구가 마음에 쿵 내려앉았다.

'모든 일들은 하나 둘 지나가고 삶은 징검다리처럼 이어졌다.

드문드문 누군가 찾아오고, 떠나갔다.'

마감시간 때문에 한두 시간 정도밖에 머물지 못했지만, 색감만 보면 차디찬 공간이라 할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한결 놓이게 되었고 한 두 가지 마음이 쓰이던 일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짧은 여정을 끝내고 집으로 향했다. 마음은 무겁고 가벼웠으며, 밤은 춥고 따뜻했고, 머리는 감성적이고 이성적이었다. 아무것도 온점을 찍은 것은 없지만 그래도 점점점은 남긴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징검다리가 이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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