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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결론

역사는 왜 비슷한 순간에 같은 결론을 낳는가

by 김윤서

다윈과 월리스는 모두 자연선택으로 종이 진화한다는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 벨과 그레이는 같은 날에 전화기 특허를 제출했다. 다우드나와 펭 장은 불과 1년 차이로 CRISPR-Cas9의 편집 기능을 밝혀냈다.


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서로 다른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위대한 업적에 도달하는 현상은 역사 속에서 계속 반복된다. 우연이 아닐 터, 이유가 무엇일까? 내 생각은 이렇다.



1. 기술과 지식이 누적되어 탐색 공간이 좁아진다.


혁신은 한 명의 천재가 갑자기 깨우치는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혁신은 오랜 시간 축적된 연구, 데이터, 기술, 이론이 임계점에 다다른 뒤에야 가능해진다. 어떤 분야든 결국 남은 질문이 비슷해지는 순간이 온다. 나는 이를 ‘탐색 공간의 수렴’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19세기 생물학은 이미 변이·경쟁·과잉번식·상속 구조를 알고 있었다.

1870년대 전기·전신 기술은 목소리를 전기신호로 보내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만큼 성숙했다.

2000년대 유전학은 시퀀싱·합성·배양·데이터 해석 등 모든 기반이 갖춰져 있었다.



2. 세계적 사건과 구조 변화는 특정 방향으로 사람들을 몰아넣는다.


탐색 공간의 수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시대적 사건이 사람들을 한 방향으로 몰아넣는다. 예를 들어 코로나19는 전 세계적으로 mRNA 플랫폼, 바이러스 벡터 기술, 초고속 백신 개발 방식에 대한 연구와 자본 투자를 전례없던 속도로 끌어올렸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mRNA 백신은 지금처럼 빠르게 자리 잡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인터넷과 우주항공 기술의 발전을 이뤄냈다.

이런 흐름은 개인의 의지나 영감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가진다.



결국 혁신은 개인의 천재성보다 ‘적분의 결과’에 가깝다. 수십 년간 쌓인 데이터, 기술 인프라, 국가적 투자, 집단적 문제의식이 어느 방향을 향해 기울기 시작할 때 혁신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에 그만한 역량을 가진 사람이 같은 결론에 가장 먼저 도달하면, 역사는 그 사람을 천재라고 부른다.



나는 이를 ‘시대의 결론’이라고 부른다.

그 시대가 밀어낸 끝자락에서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결론.


역사는 반복되고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터넷 데이터가 수십 년간 축적되었고, IT 인프라가 충분히 성숙했고, AI를 중심으로 이례적인 자본 투자가 몰렸다. 그 결과 인류는 처음으로 지능을 위임할 수 있는 시대에 들어섰다.



그렇다면 앞으로 펼쳐질 시대의 결론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는 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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