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니 「아마도 아프리카」
「아마도 아프리카」. 시집 제목을 소리내 읽자마자 필자의 머릿 속엔 ‘아마도... 아프니까?’란 찰나의 생각이 스쳐갔다. ‘아프리카’란 단어를 무심코 읽어내렸을 때, ‘아프니까’란 단어의 발음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시의 제목이 되는 시 「아마도 아프리카」를 읽었을 때, 아프리카 어딘가의 초원을 발랄하게 뛰노는 코끼리 사자 기린 얼룩말 호랑이가 무슨 아픔을 겪고 있는가 싶었다.
특이한 점은, 이제니의 시에 나타난 모습은 대부분 운율적 요소가 강조된단 점이다. 텍스트를 입으로 옮겨 그 자체로 발음하도록 유도하는 시인의 유도신문에 순식간에 필자의 혓바닥마저 슬프게 만든다. 그러니 이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는 언어로서만 존재하는 슬픔에 대해 말한다고 할 수 있겠다. 「요롱이는 말한다」에서 나타나는 ‘요롱’은 뭘까. “요롱요롱한 어투로 요롱요롱하게.” “그건 단지 요롱요롱한 세상의 요롱요롱한 틈새를 발견한 요롱요롱한 손가락의 요롱요롱한 피로.” 시를 한 번 전부 읽어 내려가니 필자는 금세 요롱요롱해졌다.
사전에 요롱요롱을 검색했으나 결과물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필자는 결국 요롱요롱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이 시에서 “가슴->눈->입->울음”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결국 종착지인 그 울음이 바로 요롱의 정체라고 생각한다. 굳이 사전적 언어로 정의하지 않아도 우리의 오감 속에 남아있는, 전두엽 속에 깊게 각인되는 그 감정이 바로 ‘요롱’의 정체, 궁극적으로 이 시가 전하고자 하는 감정의 실재인 것이다.
시적 언어는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페루」에서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는 것처럼, 양이란 것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은 것처럼 말해놓고 모순되게 ‘없을 때만 있다’는 표현을 통해 결국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각각의 양들이 모두 어떤 모습인지는 우리가 이 시집에서 느낄 수 있는 리듬감이 만들어낸 이미지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실재하지 않지만, 우리가 입 속에서 발음해보며 결국 얻게된 이미지들의 실체라고 생각한다.
특히 필자가 이 시를 읽으며 슬퍼진 이유는, ‘아마도, (나도) 아프니까’라고 생각한다. 오감과 이미지를 통한 공감은 결국 독자의 공감에서부터 이어진 것이다. 이제니의 필살기라고 할 수 있는 리듬과 운율은 결국 독자로 하여금 시에 대한 공감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시적 무기인 것이다. 그렇기에 아마도 아프리카란 제목을 보고 아프단 발상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