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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크레용 Mar 25. 2024

내가 존경하는 사람.

갱년기의 시작, 내가 존경해야하는 사람. 


내가 존경하는 사람. 


내가 20대에  가장 많이 읽은 책은 '자기개발'과 '자기 계발' 분야의 책이다. 30대에는 육아, 교육, 동화책들을 40대에는 건강과 뇌과학, 심리에 대한 책을 주로 읽었다. 나는 책에서의 지침에 몰입이 잘 되는 귀 얇은 사람이기 때문에 한 권의 책을 읽을 때마다 특정 기간은 아주 다른 인격, 다른 에너지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때그때 나를 주도하는 생각에 따라 위인들이나 유명인을 존경하기도 하고 부모나 형제, 남편을 존경하기도 하고 하다 못해 나의 아이들까지 존경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한 번도 그 '남의 인격, 사상, 행위 따위를 받들어 공경하는 -존경'이라는 단어에 나를 대입해 본 적은 없다. 누군가에게 존경받고 싶다거나, 누군가 나를 존경할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  나를 존경의 범주에  둔 적이 없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존중한 적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높이어 귀중하게 대하는 -존중' 




자기개발, 자기 계발‘자기개발’은 '지식이나 재능 따위를 발달하게 함.'‘자기 계발’은 '슬기나 재능, 사상 따위를 일깨워 줌.'의 뜻함 





존중과 존경의 상실 


20년 전, 결혼 후 신혼여행을 마치고 신혼집에 남편과 들어선 순간의 공기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고민해서 채워 넣은 살림과 가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기대와 달리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꾹꾹 눌러 연 문을 통과하는 순간 나는 전혀 다른 곳에 들어서게 됐다. 생소함과 불편함이 채우고 있던 공간이 눈에 들어오는가 싶더니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지면서 한동안 멍한 상태로 현관에 멈춰 서 있었다.  그 현관에서 정신이 차리며 든 생각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겠지?'였다.  모델 하우스를 보러 온 듯한  낯설다 못해 나와 전혀 상관없는 공간에 들어선 느낌. 그 불편함의 실체는 공간이 아닌 사람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혼 전 독립해 살아 본 적이 없는 나는, 나와 피를 나눈 오직 내 편들과 함께 살아온 안락한 시간을 무 자르듯 잘라내고 남편과 하루아침에 새로운 일상을 살아내야 했다.  신혼집에서의 일상이 보름 정도 지날 즈음 아주 무겁고, 무섭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뭘... 잘 못한 것 같다"  한 번도 누군가를 등에 지고 살아 본 적이 없었던 철부지가 매일 끼니를 해결하고 청소, 빨래, 직장까지... 드라마에서 보던 블링 블링한 신혼 생활이란 건 전혀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던 일도 아닌데?'라는 생각이 아주 꽤 많은 시간 꽤 오랜 시간 지배했지만 무시하거나 방치했다. 남편 역시 이런 생각이 없지는 않았었던지, 우린 자주 크게  싸웠다. 결혼 전 싸움이라고 해봐야 흥, 치, 피 정도였지만 일상의 책임과 부담이 가중된 싸움은 목숨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더 자기가 편한 일상 쪽으로 끌고 오느냐를 걸고 서로 처음 보는 모습들을 보이며 싸워댔다. 남편에게 진지하게 지금이라도 그만두자고 했다. 남편은 이 얘기가 나올 때마다 입을 닫았다. 이렇게 나의 첫 번째 족쇄가 채워졌다. 







© liane, 출처 Unsplash





결혼 후 5년이나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어느새 우리는 둘이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고 각자의 꿈을 향해 노력하고 서로 응원하며 살게 되었다.  긴 시간 투자한 꿈에 한 발자국 겨우 오르려는 순간, 우리에겐 영원히 없을 것 같던 '아기'가 찾아왔다.  산부인과에서 아기를 낳아 다시 집으로 돌아는 날,  오랜 시간 내가 살던 집으로 단 며칠 만에 돌아왔음에도 신혼집에 발을 들여놓을 때처럼 낯설고 불편한 공기가 나를 감쌌다. 아기가 태어나고 나의 일상은 신혼 때 보다 더 큰 지진이 덮쳐왔다. 남편과 힘겹게 맞춰온 일상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됐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똑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던 일도 아닌데?'  사람이 사람을 만들고, 키우는 이런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모성본능, 아이가 주는 기쁨, 가족의 완성 같은 말랑말랑한 감정과 기쁨을 느끼고, 누릴 틈도 없었다. 이번에는 그야말로 '생존'의 문제였다. 아기의 생존, 남편의 생존, 나의 생존.  나에게 정말 이 어마 무시한 무게를 감당할 능력이 있단 말인가... 나는 점점 더 낯설고 불편한 공기들에 잠식당해갔다. 





무겁죠 무섭죠 그대 앞에 놓인 현실이 배운 것과 달리 깨우침과 달리 점점 달리 가죠알아요 보여요 끝이 없어 주저앉고픈일만 하는 나와 얻지 못한 나의 고단한 지금들을 착한 그댄 실패들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없어요. 곱이곱이 시련마다 선택의 지혜가 쌓이죠.
<이승환 " fall to fly" 중>






어딘가에 남아있는 존중과 존경을 찾아



© springwellion, 출처 Unsplash


생각지도 못했던 무겁고, 무서운 현실을 헤치며 살아온 시간은 선택의 지혜를 쌓아주었고, 나름의 행복, 나름의 보람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 어느덧 나이 50을 코앞에 두고 있다. 아이들은 성장해 인간이 되어가고, 나와 함께 늙어가는 남편도 또 하나의 인격을 만들어가고 있다.  숨 가쁘게 흐르던 일상에 이상한 균열이 느껴진다. 이제까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불규칙하지만 불쑥불쑥 튀어나온 쉼표들... 그런 쉼표가 나타날 때마다 멈칫 멈칫하게 된다. '뭘 해야 하나?'싶더니 이내 '뭔가를 해야 하나?'로 바뀐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느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전혀 돌아보지 않았던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다. 막상 뭔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은 노력마저 귀찮게 느껴졌다. 그렇게 기다리던 시간이지만 목줄에 묵여있던 낙타는 목줄이 없어도 그 자리에 있게 되는 것처럼 나는 걸음을 떼지 않고 여전히 가족을 기다리고 가족의 안위만 살피며 나를 회피하고 있었다. 


무의식은 이미 오래전에  나를 찾아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또 다른 일상의 변화가 무겁고, 무서워서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방치했다. 더 늦기 전에 이제 내가 나를 높여 귀하게 여기 겨야 할 시간이 되었다. 나의 생각, 감정, 기분, 선택에 집중하며 더 높아지고, 더 귀해져서 남들도 절로 나의 인격, 사상, 행위를 받들어 공경하며 -존경하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fall to fly 날기 위해 내게 날개가 있다는 걸 알기 위해 닫힌 문 앞에 언제까지 서성일 거죠. 우물쭈물 말고 뛰어보는 거죠 포기의 용기로 날아요 날아요 날아올라요. fall to fly 날기 위해 내게 날개가 있다는 걸 알기 위해 견뎌요 ( 거친 바람 달려든대도 ) 맞서요 ( 거센 비에 휩쓸린대도 )우뚝 솟은 어깻죽지에 ( 푸득 거리며 ) 비상의 날갯짓 그날은 오죠
<이승환 "fall to 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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