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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호 Aug 04. 2022

"안중근을 그의 시대에 가두어놓을 수 없다"

[조용호의 문학공간] 김훈 장편소설 ‘하얼빈’

안중근 마지막 3년을 담은 김훈 신작 장편 '하얼빈'

젊은 시절부터 구상한 작품, 병고 끝에 서둘러 완성

좌고우면하지 않는 청춘의 아름다운 결행에 충격

영웅적인 면모보다 개인의 영혼과 생명력에 초점

"안중근 시대보다 더 고통스러운 위기의 동양 평화"



'사형수의 머리와 사제의 머리가 가까워졌다. 안중근의 목소리는 숨소리처럼 들렸다. 옥리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목소리가 끊기고,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빌렘은 침묵 속에서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베풀었다.'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의 명을 어기고 여순 감옥으로 가서 안중근 토마스에게 마지막 성사를 주었다. 옥리들이 입회해 있으니 작은 소리로 말하라고,  말하라고 신부가 말했다. 안중근은 몸을 앞으로 굽히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숨소리처럼 들렸다고, 김훈은 안중근의 마지막 3년을 담은 신작 장편 '하얼빈'(문학동네) 썼다. 안중근은 마지막 가는 길에 신을 대리한 사제에게 무엇을 고백했을까.


'필생의 과업'이 아니라 '필생의 방치' 상태로 놓아 두었다는 안중근 소설 '하얼빈'을 펴내고 기자들과 만난 김훈. [조용호]


그동안 안중근(1879~1910)을 담은 연구서나 르포 보고서 등은 한국은 물론 일본 북한 중국에서도 많이 나왔다. 소설이나 영화 뮤지컬로도 다루어졌고, 다양한 단체에서 여러 운동도 벌였다. 김훈은 이런 것들이 한결같이 "안중근의 민족주의적 열정이나 영웅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고 그런 면을 뺄 수 없다"면서도 "저는 무엇보다 안중근의 청춘, 영혼과 생명력, 이런 것들을 소설로 묘사해보고 싶은 것이 소망이었다"고 3일 서울 합정동 카페에서 기자들과 만나 밝혔다.


"이 소설은 젊었을 때부터 쓰고 싶었던 소설입니다. 안중근과 우덕순이 블라디보스톡 허름한 술집에서 만나 열흘 후에 이토가 온다는데 죽이러 가자, 그러니까 우덕순이 가자고 결의하던 부분이 소설을 쓰면서 가장 신바람나고 행복했던 대목입니다. 이 두 젊은이가 거기서 만나 이 일을 왜 해야 되느냐, 대의명분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토론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다음날 아침에 역으로 가서 기차 타고 하얼빈으로 갔습니다. 소설에도 나와 있지만, 체포된 후 검찰과 법원의 신문에도 일관되게 진술된 내용입니다. 이 대목이 가장 놀랍고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젊은이다운 에너지가 폭발하는 것이죠. 두 젊은이들에게 그 시대 고뇌는 무거운 것이었지만, 그들의 처신은 바람처럼 가벼웠습니다. 정말 청춘이 아름답다는 말은 이런 때 할 수 있는 말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젊은 시절 안중근 신문 조서와 이순신의 '난중일기' 접한  필생의 과제가   인물은 '칼의 노래' 이어 이번에 '하얼빈'으로 결실을 맺게 됐다고 김훈은 말했다. '하얼빈'에도 이순신에게 투사했던 것처럼 왕조나 국가보다 '개인' 초점을 맞추는 김훈 특유의 시선이 여일하게 관통하고 있다.  바탕 위에 위정자나 지배자들의 허위와 이기에 대한 도저한 비판의식도 마찬가지다.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넘긴 자들을 벌하라는 간곡한 호소에 왕은 '너는 천리를 말한다마는 시세를 따르는 것도 또한 순리가 아니겠느냐'고 답한다. 거듭되는 상소에 왕은 '어찌 이리 번거롭게 구는가'라고 호통을 친다. 간사한 무리가 외국 군대의 위세를 업고 폐하를 위협하고 있다며 피를 토해도 '임금은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는다'면서 백성들을 탓한다. "무리를 지어서 울부짖으며 달려드는 백성들아, 서로 타이르고 이끌어서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힘쓰라. 나는 어린아이를 달래고 꾸짖듯이 말한다. 아아 백성들아, 아아 백성들아." '난중일기'와 '남한산성'에 이어 왕조 말기 '하얼빈'에 이르러서도 조선의 왕은 김훈의 펜끝 아래 일관된 모습이다. 관리들도 여전하다.


청일전쟁으로 조선 땅이 외세의 싸움판이 됐을 때 "평양성의 조선 관리들은 청나라 편도 일본 편도 백성의 편도 아니었다"고 김훈은 쓴다. '평양 관리들은 평양성에서 청군과 일군이 전투를 시작하기 전부터 처자식들을 데리고 인근의 산속으로 들어갔다가 청나라 군대가 패해서 달아난 후에 평양성으로 돌아왔다. 평양성 관아 마당과 거리에 시체가 널렸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이토의 장례식을 치르기 전부터 서울에는 이토의 송덕비와 동상을 세우자는 건의들이 통감부에 접수되었다고, 김훈은 기록을 찾아내 썼다. 정작 통감부가 허가하지 않았다. '통감부는 건의한 자들을 불러들여서 충정은 이해하나 바닥 민심이 어수선하니 경거망동을 삼가라고 경고했다. 이토의 동상을 세운다고 모금을 해서 돈을 떼어먹으려던 자들이 경시청에 검거되었다. 한국 황제의 어명을 받은 조문사절을 사칭하는 자들이 대련으로 건너가서 이토의 관을 실은 배를 향해서 절했다.'


자신의 안위와 욕망만을 좇는 위정자의 '왕조'와 '국가'란 개인에게 어떤 의미일까. 천주교 박해 과정에서 황사영은 외국 군대가 들어와 그들을 박해한 국가를 징벌하고 구해줄 것을 탄원하다가 발각돼 능지처참됐지만 안중근은 그 국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 이를 두고 김훈은 "황사영은 국가를 제거하려다가 죽임을 당했고 안중근은 국가를 회복하려고 남을 죽이고 저도 죽게 되었는데, 뮈텔은 이 젊은이들의 운명을 가로막고 있는 '국가'를 가엾이 여겼다"고 썼다. 김훈에게 '국가'란 무엇일까.


김훈은 틈틈이 많은 자료를 찾고 취재를 해오면서 폭이 넓은 작품을 구상했지만, 지난해 병고를 겪고 난 뒤 안중근의 마지막 3년에 집중해 소설을 완성했다고 밝혔다. [조용호]


"국가란 나에게 무엇인가? 그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굳이 국가와 개인을 두고 묻는다면 나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의 편입니다. 개인은 더이상 분할할 수 없는 궁극적인 존재입니다. 국가와 사회는 그 위에 건설돼 있는 거죠. 거꾸로 하면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동양 전통에서 개인에 대한 사유는 매우 빈약하거나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궁극적인 개인에 대한 고민이 없습니다. 동양의 아들로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한스럽게 생각합니다. 국가는 결국 개인의 토대 위에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뮈텔 주교가 조선에서 본 백성들은 '땅에 들러붙어서 기진해 있었고, 오백 년 왕조의 죄업이 탈진한 사람들의 어깨 위에 쌓여 있었다'고 김훈은 썼다. 뮈텔은 그들을 천주의 품으로 끌어들였는데 안중근을 비롯한 그의 집안도 그 대열에 동참했다. '하얼빈'은 "이토 히로부미로 상징되는 일본 제국주의와의 갈등을 축으로 천주교 신자 안중근과 사제의 갈등, 문명 개화와 약육강식의 야만이 충돌하는 세 개의 갈등을 바탕으로 전개했다"고 김훈은 말했다.


김훈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대부분 죽어 마땅한 쓰레기 같은 인물로 단순히 처리하는데 비해 그의 캐릭터를 제대로 형상화하기 위해 자료 수집과 취재에 힘을 쏟았다고 했다. 필생의 과업이라기보다, 밥벌이에 지쳐 필생의 방치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했다. 지난해 병고를 겪고 난 뒤 서둘러 완성하기 위해 안중근의 거사 직전 마지막 3년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대거 생략됐지만 이토의 문명개화 명분과 그 이중성을 표현하는데는 기여한 것 같다고 김훈은 말했다. 그는 "이토라는 한 인간 안에서 문명개화라는 큰 사업과 약육강식의 야만성이 동시에 형성되고 존재하면서 안중근과 부딪칠 수밖에 없는 그 부분을 형상화하려고 노력했다"면서 "거대한 군사력과 문명개화의 명분을 가진 이토와 동양 평화를 지향한 안중근이 숙명적으로 하얼빈에서 만난 비극 속에 들어 있는 욕망까지 묘사하는 것이 이 소설을 쓰려는 나의 소망이었다"고 덧붙였다.

김훈은 자신의 소설이 '반일민족주의'로 이해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조용호]


이토는 "조선이 평화와 독립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길은 제국의 틀 안으로 순입하는 것이 조선의 독립이고 동양의 평화"라고 강변한다. 나아가 "문명의 길에서는 앞선 자가 선의로써 뒤처진 자를 개발 유도할 책무가 있다"면서 "나는 이 책무를 수행함으로써 동양의 평화를 이루고자 한다"고 역설한다.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한 뒤 마조부치 검사와 나눈 문답은 이토의 주장을 뒤엎는다.


-그대가 말하는 동양 평화란 어떤 의미인가?

-동양의 모든 나라가 자주독립하는 것이다.

-그중 한 나라만이라도 자주독립하지 못하면 동양 평화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


이 문답을 두고 김훈은 "미조부치는 그물을 넓게 던져서 안중근을 가두어놓고 천천히 조여갔지만, 안중근은 그물의 범위 밖에 있거나, 그물을 찢고 나갔다"고 썼다. 그는 "이 소설이 반일민족주의로 이해되는 건 원하는 바가 아니다"고 말했다. 민족주의는 국권이 위태로울 때 국권 회복을 위해 하나로 모으는데 유효한 이데올로기이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세력끼리 갈등하는 조건에서 민족주의가 통합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는 건 낭만적인 생각이라는 것이다. 김훈은 "안중근을 그의 시대 안에 가두어놓을 수는 없다"고  썼다.


"안중근 때의 동양과 비교하면 지금 우리는  고통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안중근 시대의 중국은  무너져서 일본 제국주의의 먹잇감이었는데 지금 중국은 세계 최대 강대국이 됐고 북한은 핵으로 무장했습니다. 중국과 북한이 군사동맹을 맺고 있어요. 일본은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대국주의로 나가는 상황이어서 동양 평화는 안중근 시대보다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중근을  시대에 가두어놓고 이것은  시대에 국한됐다고 이야기할  없다고 썼는데, 초야의 인간으로서 너무 정돈되지 않은 말을 붙이는  같아서  문장으로 끝냈던 겁니다."


김훈은 안중근 아내 김아려의 '거대하고 끔찍한 고통'을 언급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조용호]


김훈은 이 소설을 쓰면서 안중근의 처자식에 대해 언급할 때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얼굴도 보지 못한 둘째 아들을 포함한 3남매와 아내 김아려(1876~1946)를 하얼빈까지 데려오라고 부탁했는데, 그들은 안중근의 거사 다음날 도착했다. 거사 전에 그들을 만났다면 갈등이 심해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라 안중근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겼다. 김훈은 차마 김아려의 '끔찍하고 거대한 고통'을 다 표현할 수 없어서 면회온 동생에게 "내가 처자식에게 몹쓸 짓을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대사 한 마디로 얼버무렸다고 말했다.


김훈은 후기에 김아려의 생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김아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기억이나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고 부기했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항소를 하지 말고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는 항간의 이야기도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썼다.


'아침에 옥리들이 감방에 새 옷을 넣어주었다. 안중근은 집행 절차가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고향에서 어머니가 보내온 명주 두루마기와 바지가 개어져 있었다. 두루마기는 흰색이고 바지는 검은색이었다. 안중근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흰 두루마기 아래로 검은 바지 자락이 드러났다. 명주 두루마기는 부드럽고 포근했다. 새 옷의 향기가 몸에 스몄다.'



*이 글은 UPI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www.upinews.kr/newsView/upi202208030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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