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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호 Aug 27. 2022

“나는 소설가라는 무기징역수"

[조용호의 문학공간]  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선 ‘지고 말 것을’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단편집 '지고 말 것을'

죽음과 허무가 지배하는 초기 단편 중심으로 선별

'푸른 바다 검은 바다' 등 7편 중 4편은 국내 첫 번역

현실 그 자체로는 내려올 수 없는 예술가의 운명

"삶과 죽음, 허무와 고독에 대한 상념과 인간 관찰"



'요즈음 저는 영계에서 당신이 전하는 사랑의 증표를 듣거나 황천이나 내세에서 당신의 연인이 되기보다, 당신도 저도 홍매화나 협죽도꽃이 되어 꽃가루를 나르는 나비의 도움을 받아 결혼하는 편이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슬픈 습성에 따라 이렇게 죽은 이에게 말을 건네는 일도 없을 테지요.'


일본에 첫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동네 제공]


일본에 첫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의 단편들을 선별한 소설집 '지고 말 것을'(박혜성 옮김, 문학동네)이 출간됐다. 국내에 가와바타 전집이 일찌감치 번역돼 나와 있지만, 200여 편이 넘는 많은 단편을 써낸 가와바타의 모든 작품이 소개된 건 아니다. 이번 선집에는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푸른 바다 검은 바다' '봄날의 풍경' '수정환상' '그것을 본 사람들'을 비롯해, '봄날의 경치' '서정가' '금수' '지고 말 것을' 등 초기 단편 7편이 수록됐다.


가와바타는 한국 독자들에게 '설국'이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서정적인 문체에 담은 탐미적인 세계로 안내하는 그의 문학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다. 그는 산문을 쓰는 소설가이지만, 문체와 문장으로만 보면 시인에 더 가깝다. 이번 단편들에도 이러한 그의 특성이 보다 두드러진다. 이 중에서도 '서정가'는 가와바타 문장 특유의 '가련한 아름다움'이 잘 담겨 있다는 평가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한 후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어버린다. 그녀가 변하지 않은 사랑의 마음을 담아 그에게 쓰는 편지가 '서정가'이다.


서두에 "죽은 사람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은 슬픈 인간의 습성"이라면서 "인간이 죽은 후 저세상에서조차 생전의 인간 모습 그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더욱 슬픈 인간의 습성"이라고 편지의 운을 뗀다. 그녀는 "불교의 여러 경문을 비길 데 없이 고마운 서정시라고 생각하는 저는 이렇게 죽은 사람인 당신에게 말을 걸면서도, 저세상에서도 역시 이 세상에서와 같은 모습을 하고 계실 당신에게 말을 거는 것보다는, 봉오리를 일찍 피운 제 눈앞의 홍매화를 보며 당신이 환생하신 거라는 이야기를 지어내어 도코노마의 홍매화에게 말을 거는 편이 훨씬 기쁜 일"이라고 이어간다.


그녀는 "윤회와 전생의 가르침만큼 풍부한 꿈을 짜 넣은 이야기는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한다"면서 "인간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서정시"가 바로 불교의 경문이라고 말한다. 가와바타 역시 "나는 동방의 고전, 특히 불교경전을 세계 최대의 문학이라고 믿고 있다"면서 "나는 경전을 종교적 교훈이 아니라 문학적 환상으로 존중한다"고 자서전에 쓴 바 있다. '서정가'를 맺는 마지막 문장은 '인간만이 존귀하다고 여기는 생에 대한 쓸쓸한 집착'을 미학적으로 전복하는 서정적인 울림으로 나아간다.


미시마 유키오를 비롯한 문학가들은 물론 가와바타 본인도 무척 아낀 단편으로 알려진 '서정가', 이번에 처음 번역된 '푸른 바다 검은 바다' 서정은 같은 반열에 있다. 애인과의 동반자살에 실패한 남자가 다시 한번 자살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개의 유서로 남긴  단편의 남자도 내세에 이승의 습속이 그대로 이어지는 삶을 바라지 않는다.  단편에서 기사코라는 소녀는 열일곱  되던 가을에 결혼을 약속했지만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하지만 저는 그리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 또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우리집 마당에도 작약꽃이 있습니다. 기사코네 집 마당에도 작약꽃이 있습니다. 뿌리만 썩지 않는다면 내년 5월에는 또다시 꽃이 피겠지요. 그러면 나비가 우리집 꽃의 꽃가루를 기사코네 집 꽃한테 옮겨주는 일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빛나는 문장들은 그대로 산문시에 가깝다. 유령과의 이런 대화. "얼마든지 들어오세요. 사람 머리의 문에는 자물쇠가 없어요." "그러나 삶과 죽음 사이의 문에는?" "등나무꽃 한 송이로도 열 수 있답니다." 삶과 죽음 사이의 문 정도는 꽃 한 송이로도 열 수 있다는 말. 허무하고 쓸쓸하지만 탐미적이고 비장하다. '봄날의 경치'에 묘사되는 대나무숲은 문자로 그려내는 눈부신 그림이다. '주변의 대나무숲이 흔들리는데도 삼나무숲은 조용했다. 대나무숲에는 아침이 일찍 찾아오고 삼나무숲에는 저녁이 일찍 온다. 그러나 그때는 낮이었다. 낮은 대나무숲의 것이다. 대나뭇잎은 날개만 있는 잠자리 무리처럼 햇빛과 즐겁게 노닥거린다.'


'지고 말 것을'은 문하생으로 들어온 젊은 두 여성이 창졸간에 어이없이 살해당한 뒤 살인자의 심리와 죽은 여성들의 태도를 소설가의 시각으로 다시 풀어낸 단편이다. 스물다섯 살 사부로가, 스물세 살 다키코와 스물한 살 쓰타코를 단도로 찌르고 목을 졸라 죽였다. 단지 놀라게 하려다 우발적으로 벌인 행각이라고 진술했다. 서른네 살 '나'가 이 사건의 맥락을 소설로 풀어가는데, 또다른 자아인 '악마'가 이죽거린다.


'두 사람이 어이없이 살해당한 것에 책임은 느끼지 않고 말이지. 너는 이 살인 사건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싶어서 스스로 여러 가지 만족스러운 의미를 갖다 붙였어. 두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보면 돼. 이 살인을 세 사람의 생애와 아무 연관도 없고 세 사람의 생활과 아무 관계도 없는 거라고, 즉 이 하나의 행위만이 허공에 둥둥 뜬 것, 말하자면 뿌리도 잎사귀도 없이 꽃만 있는 꽃, 사물이 없는 빛뿐인 빛,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싶은 모양인데, 허접한 싸구려 소설가가 그런 광대무변한 고마움을 감히 바랄 수나 있으려나. 꼴좋군.'


'허무'와 '탐미'에 집착하는 자아에 대한 반성처럼 읽히는 이러한 힐난에 작가는 '나는 소설가라는 무기징역수'라고 항변한다. 영원히 현실 그 자체로는 내려올 수 없는, 소설이라는 예술에 헌신하는 운명이라는 고백인 셈이다. 그는 어차피 범인의 진술이나 취조한 자의 조서나 모두 '소설'의 운명을 떠날 수 없다고, 모두의 합작 소설이라는 시각이다. 소설 속 작가의 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어린시절 부모와 누나를 연이어 잃어 그의 작품에는 죽음과 허무가 깊이 스며 있다. [나무위키]


'이 한 편은 소송기록이나 정신감정 보고에 힘입은 바가 너무 많다. 나 혼자 쓴 소설인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러나 글 여기저기에서 서술했듯이 그 기록도 어차피 범인이나 법관, 또한 그 외 다른 사람들의 소설이니, 나도 그들의 합작자 중 하나로 넣어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어느 것이나 모두 사람이 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향기롭고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도 언젠가는 지고 말 것을 생각하며, 세 사람의 영혼에 명복을 빌고 싶은 소박한 마음으로 나는 이 글을 썼다.'


이번 선집에는 이밖에도 살인 사건으로 죽은 여성에 관계된 사람들을 그린 '그것을 본 사람들', 아기를 못 가지는 여성의 성적인 상상을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전개하는 '수정환상' 등이 수록됐다. 새를 좋아했던 가와바타의 취향은 새를 키우는 남자의 시선을 담은 '금수'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작은 새를 새로 들이면 이삼일은 일상이 그 야말로 싱싱한 느낌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세상에 고마움을 느꼈다. 아마 자신이 문제겠지만 인간에게서는 좀처럼 그와 같은 고마움을 느낄 수 없었다. 살아 움직이는 작은 새를 보면 조개껍데기나 아름다운 풀꽃을 볼 때보다도 우주 만물의 신비를 빨리 알 수 있었다. 새장 안의 새일지라도, 작은 것들은 살아 있는 기쁨을 잔뜩 보여주었다.'


어린시절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 누나까지 연이어 죽고 고아로 친척집에서 자라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들에는 죽음과 허무가 강하게 녹아 있다. 이번 소설집 역자 박혜성(한밭대학교 일본어과 교수)은 "줄바꾸기가 거의 없는 만연체와, 번역투와도 비슷한 독특한 작가의 문체를 살리면서도 독자에게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내야 하는 점에서 특히 많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무엇보다 이 작품들에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는 것은 '인간 생명'에 대한 작가의 사상이며 삶과 죽음, 고독에 대한 인간 관찰"이라고 후기에 썼다.




*이 글은 UPI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www.upinews.kr/newsView/upi20220826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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