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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신통력과 신력, 그 두려움과 경계의 시간

by 엄마쌤강민주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잠에서 깰 때마다 등줄기는 식은땀으로 흥건했고, 가슴은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꿈일 뿐이야.”

수백 번 되뇌었지만, 그것은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또렷했다. 나는 그 세계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있었다. 내 안의 누군가는 그 꿈속에서도 또렷하게 살아 있었다.

나는 그런 꿈을 꾸지 않는 세상을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더 간절히 기도했다.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떨리는 손을 모은 채 눈을 감았다. 그러나 기도가 깊어질수록, 꿈은 더 깊고, 더 음침해졌다.

꿈속에서 나는 미래를 보았다. 아직 오지 않은 어떤 날의 풍경.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곧 벌어질 일’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또 어떤 밤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시간으로 떨어졌다. 낯선 옷, 낯선 말, 낯선 나. 그리고 그 과거의 일이 이 생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는지, 나는 꿈을 통해 알게 되었다.

어떤 날은 신과 대화를 나누었고, 신은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유산된 아이들이 그리움과 애잔함으로 엄마인 나에게 말을 걸기도 했고, 때로는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빌려 그 존재를 알리기도 했다. 아직 이 세상에 오지 않았지만 나와 인연이 있는 미래의 아이가 내 곁을 서성이기도 했다. 지옥에서 손을 뻗으며 나를 향해 “구해 달라”라고 외치는 이들에 대한 꿈을 자주 꾸었다. 나는 그들의 손아귀에 잡힐까 두려워 몸을 움츠리기도 했다. 무시무시한 형상의 귀신들이 차가운 한기를 뿜으며 달려들기도 했고, 때로는 귀여운 아기 모습으로 내 품에 파고들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시대를 넘어 존재했다. 다른 시대, 다른 장소, 다른 얼굴과 이름으로. 그러나 그 모든 존재는 분명 ‘나’였다.


그 무수한 밤의 체험들은 말 그대로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불경을 읽는 시간이 쌓이고, 수행이 깊어질수록 기묘하게도 꿈의 분위기는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희미한 빛처럼 다가온 변화였다. 꿈속의 나는 점점 두려움에 끌려가는 존재가 아닌, 자기 의지를 가진 존재로 바뀌고 있었다. 귀신이 나타나면, 나는 그들이 떠날 때까지 진언을 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꿈속에서 나를 돕기 위해 다가오는 존재들이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무속인, 따뜻한 눈빛의 스님, 손을 내미는 관세음보살, 그리고… 피붙이였던 누군가. 오래전 세상을 떠난 조상들이었다.

그곳에서 본 장면이 이 생의 현실로 이어졌고, 꿈에서 받은 지침이 눈앞의 상황에 답이 되었다. 나는 서서히, 이것이 단순한 ‘꿈’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 밤, 나는 분명히 느꼈다. 누군가가 내 고단한 삶의 길 위에서 내게 작은 등불 하나를 건네고 있다는 것을. 바로 그 등불은, 부처님의 가르침이었다. 그 후로 나는 이 길을 더욱 믿게 되었다. 마음은 조금씩 맑아졌고, 눈에 보이는 세상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은 내 체험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을 때, 돌아온 건 경이로움이 아니라… 조롱이었다.

“미친 또라이.”

“작두 탈 뻔했네.”

“그건 신력이야, 위험한 거야.”

“경계다, 마구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정말 내가 미친 걸까? 신이 계속 꿈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데, 혹시 무속인의 운명 같은 것이 내게 있는 걸까?


‘신력이다’, ‘마구니다’라며 두려워하는 이들의 말은 더욱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왜냐하면, 내가 본 것은 어둠이 아니라 분명 ‘빛’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나의 체험을 불길한 저주처럼 여기는 걸까?


나는 나에게 답을 줄 누군가를 기다렸다. 언젠가 선지식 한 분이 내 앞에 짠— 하고 나타나, 내 모든 의문에 명쾌한 답을 내려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런 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체험을 듣고 나를 이용하려는 탐욕스러운 눈빛만 마주할 때가 많았다.


결국 나는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갔다. 불경, 불서, 경전들. 그 안에서 단서를 찾고 또 찾았다.


시간이 흐르자, 내 안에서 펼쳐지던 그 신비한 세계는 점점 선명해졌고 그 체험은 내 인생의 여러 의문에 스스로 답을 내리기 시작했다. 마음은 고요해졌고, 나는 더는 길을 잃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내면의 치열함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했다.

“걱정 하나 없는 부잣집 사모님 같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리 세상 다 아는 팔십 노파처럼 이야기해?”

나는 대부분 웃으며 넘겼지만, 가끔은 내가 겪은 세계를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용히 나에게서 멀어졌다. (물론, 그것은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다시 혼란이 밀려왔다.

‘내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걸까?’

‘이 모든 게 내가 만들어낸 착각일 뿐일까?’


그때, 같은 절에 다니던 한 분이 내게 말했다.

“사람들은 당신이 아는 것만큼도 몰라요. 당신이 아는 것만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줘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러니 당신이 아는 것을, 그냥 알려주세요.”

나는 그 말에 용기를 얻었다. 그래, 내가 아는 만큼만이라도. 그래서 나는 그 후, 내 체험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지금도 나는 모든 진실을 다 안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글이 누군가에게 작은 등불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복을 짓듯 글을 쓴다. 글을 쓰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내가 아는 바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오늘의 글은 수행하면서 가장 두려웠고, 가장 혼란스러웠던 그 순간에서 시작하려 한다. 바로 신통력과 신력에 대한 이야기다.


수행을 하면 신기한 능력이 생긴다는 것. 그것은 내가 오랜 시간 읽어온 수많은 불서 속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진리였다. 책에 그렇게 쓰여 있으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험을 이야기하니까. 내 눈으로 보았으니까.


그런데 왜, 그 길을 실제로 걷는 내가 신비한 현상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나를 두려움과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는 걸까?

“신기 있네. 작두 탈 뻔했네. 그런 건 불교가 아니야.”

“그건 네 착각이야. 헛것을 본 거야.”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통력도, 신력도 실제로 존재한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건 주로 신력이다. 무속인의 힘이라거나 통제할 수 없는 신비한 기운으로 오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행자의 길에서는 신통력과 신력 모두를 ‘경험하는 시점’이 반드시 찾아온다.


불교에서는 분별력, 곧 지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신통력과 신력을 구분하지 못하면 자신의 체험을 착각하게 되고 외부의 현상을 오해하게 되며 결국, 자신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가 깨달은 바는 이렇다.

� 신통력은 내면의 수행에서 비롯된 힘이다. 선정(禪定)과 정진을 통해 수행자가 스스로 만들어낸 능력이다. 그러나 여기에 집착하거나 자만하면, 그것은 곧 **마장(魔障)**이 된다.


� 신력은 외부에서 오는 절대적인 힘이다. 부처님의 가피, 보살의 자비, 우주 법계의 흐름에서 오는 힘이다. 이것을 ‘내 힘’이라 착각하면 교만에 빠지고, 수행의 맑음은 흐려진다.

정리하자면, 신통력은 ‘내 안에서 만들어진 체험’, 신력은 ‘내 밖에서 다가온 힘’이다. 이 둘을 혼동하게 되면 분별력이 흐려지고 수행의 중심이 흔들린다.


그러나 또 하나의 진실. 때로는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안목이 필요하지만, 때로는 그 구분을 초월하는 지혜가 더 절실하다.


수행을 하다 보면 신력의 도움으로 환희심이 일고, 그 환희심이 또 정진의 힘이 되어 신통력이 생기기도 한다. 두 힘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얽혀 있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모든 것이 ‘경계’ 일뿐이라는 안목이다. 무슨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나든, 밖에서 어떤 기운이 덮쳐오든 그 모든 것을 ‘지나가는 구름’처럼 바라보며 흘려보내야 한다. 이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매이는 순간

그 마음이 또 다른 마장이 된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신통을 부려도, 무아를 깨닫지 못하면 중생일 뿐이다.”

“신통이든 신력이든, 그것에 끌리는 마음이 문제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에서는 그 신통력 속에서 마주한 더 깊은 경계의 체험에 대해

조심스럽게 펼쳐보고자 한다.

지금은 그저 이 한마디만 덧붙이고 싶다. 아무리 신기하고 특별한 체험이라 해도, 그것에 붙잡히지 말 것. 그 어떤 것도, 진리를 대신할 수는 없으니까.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십선(十善)에 의지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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