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위원회 공모전 참여 글
고등학생인 아이가 책가방을 내려놓으며 입을 삐쭉거리며 내뱉는다.
“내가 우주의 생성 과정을 왜 알아야 하나 몰라. 이미 이렇게 만들어져 있는 건데 알아서 무슨 도움이 된다고.”
가뜩이나 뇌용량에 과부하가 쉽게 걸리는 우리 아이에게 힘든 하루였나 보다. 한숨 고르게 하고 간식 챙겨주며 슬쩍 한마디 건넸다.
“아들, 인류가 수 천 년에 걸쳐서 유레카 외치며 알게 된 것들을 중, 고등학교 6년 동안 압축해서 가르쳐 주는데, 그것도 공짜로, 감사해야 할 일 아니야?”
반격이 나올 줄 알았는데, 웬걸. 수긍한다.
“아 생각해보니 그렇네, 그럼 그건 인정. 근데 왜 시험을 봐?”
“학생들이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 선생님이 파악해야 다음에 가르치실 때 참고하시지. 엄마는 시험 잘 보는 것보다도 우리 아들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지면 그걸로 족해.”
‘이왕이면 시험 점수가 좋으면 더 좋지’라고 한마디 얹고 싶었지만, 사춘기 아들의 반격을 피하려 속으로만 덧붙였다.
사실 나 역시 그 공짜의 가르침을 받을 때는 아이와 같은 마음이었다. 수학의 2, 3차 그래프는 왜 그렇게 꼬여있으며,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하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열역학 1, 2 법칙이 나에게 왜 필요한지 이유를 모르겠고, 당위성이 없으니 관심이 가지 않았다.
누군가 가르침을 공짜로 줄 때는 배움이란 것이 그렇게 지루하기만 하더니, 돈벌이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렇게 시간과 돈을 내어가면서까지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어졌다. 운동, 음악, 미술은 물론 세계사, 외국어, 심지어 그렇게도 이해 안 되던 우주의 탄생, 양자역학 등등 먹고 사는 문제에는 쓰이지 않을 온갖 것들에 관심이 갔다.
다행스럽게 다양한 전문가들이 여기저기 매체에서 각자만의 가르침으로 나에게 그 세계를 알려준다. 어떨 때는 잠자는 시간도 쪼개가며 손안의 핸드폰 속에서 그들의 가르침에 빠져들다가 내 영혼은 안드로메다로 가기도 한다.
그렇다. 이제는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마음만 먹으면 향유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한 가수가 발매한 곡을 바로 들을 수도 있고, 유럽의 한 생명공학자가 발표한 논문을 기다리지 않고 읽을 수도 있다. 십 년도 더 된 일인데 에티오피아 출장 중에 옆에 앉아 있던 한 소녀가 케이팝 노래를 흥얼거리던 기억이 난다. 충격에 가까웠다. 전 세계 사람들이 동시에 같은 것을 누리는 것이 가능한지 꽤 되었다.
그런데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일반 사람들에게 지식과 창조물로 접근할 수 있는 벽은 지금 서울의 강남 아파트처럼 높은 것이었다. 글을 읽지 못해서, 지식인에 대한 정치적인 탄압으로, 종교의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입에 풀칠하기 위해 밭을 갈아야 하는 이유로 지식과 문화의 향유 밖에서 서성일 수밖에 없던 상황들이 긴 역사 속에 있었다.
요즘은 새로운 지식과 다양한 영역의 창작물들이 차고 넘친다. 다양한 영역에서의 창작물들이 유례없이 화수분처럼 뿜어져 나오는 세상이다. 창작의 세계에도 희소성의 경제 법칙이 적용되는 것일까. 봇물 터지듯 하루에도 여기저기서 뿜어져 나오는 지식과 정보를 누구나 손쉽게 얻을 수 있어 그 가치가 퇴색되어 가는 것일까. 많은 사람이 창작자와 그 노력의 과정을 가볍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나 역시 다양한 창작물들의 소비자로서만 존재했을 때는 가볍게 여기고 생각해보지도 않은 것들이었다. 이제 일기장을 벗어나 나를 모르는 사람들도 볼 수 있는 곳에 글을 끄적거리는 처지가 되고 보니, 그 모든 과정이 녹록지 않다. 신춘문예 공모전에 작품을 내는 것도 아니면서 한 편의 에세이를 마무리하고 발행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는 쓴 글을 깎고 다듬고, 힘들게 내 안에서 뽑아낸 몇 문장을 통째로 날리기도 한다. 세상에 쏟아져 나온 모든 창작물은 창작자의 잉태와 출산의 고통 끝에 나오는 생명이란 말이 절실하다 와 닿는다.
한강 작가는 <출간 후에> 라는 수필에서 말한다.
더 이상 새벽에 일어나 촛불을 켜지 않아도 된다고. 외딴집이 정전됐을 때 촛불이 얼마나 밝은지 보려고 보일러 센서 등을 가리고 냉장고 코드를 뽑지 않아도 된다고. 살갗에서 눈이 녹는 감각을 기억하려고 손이 빳빳해질 때까지 눈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고. 눈이 내리기 시작할 때마다 가장 가까운 산을 향해 택시로 달려가지 않아도 된다고. 구덩이 안쪽을 느끼려고 책상 아래 모도 누워 있지 않아도 된다고.
문장 하나를 만들어 내기 위해 작은 몸 전체의 온 감각을 힘들게 시험해 봤던 몇 년간의 모습에 경이로움이 상상하면 소설 한 문장 한 문장을 쉽게 흘려버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온 정성을 쏟아 세상에 내어놓은 자식 같은 애들을 누가 업어가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냥 꼭꼭 숨겨두어야 하는 걸까 몸이 움츠러들기도 한다.
세상의 창작물에 창조자의 고유한 지문이 자동으로 찍혀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못한 현실에 그 과정과 결과물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저작권이라는 제도가 생겼을 것이다. 저작권법도 제정 이후 칠십 년 이상 지속되며 저작물에 대한 정의도 다양하게 늘어나고 법 조항 자체도 두 배로 늘어나는 것은 현재의 창조 활동이 다양해졌음을 반증할 것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다고 해서 쉽게 누리고 이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배울 것이 너무 많다며 투덜거리는 아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이 모든 것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숭고한 창작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사실 이 숭고함을 기리기 위해 법으로 보호받는 저작물도 성인이 되기 전까지 받는 교육에서는 예외적으로 허용된다는 것을 안다면 중고등학교의 교육에 정말 감사해야 할 텐데.
아들아, 어떤 분야의 지식이 모여 너의 새로운 화수분을 만들어갈지 공짜 가르침을 감사히 받으며 충분히 누리고 천천히 찾아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