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전과는 다른 여름휴가가 내게 주는 의미
나는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이다.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아스팔트의 열기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도로 위에 서 있는 상상만으로도 견디지 못할 만큼 불쾌지수가 올라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은 내게 가장 중요한 사계절 중 하나이다. 그 이유는 바로 여름휴가 때문이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여름은 나에게 가장 중요한 계절이 되었다. 일 -집 -일 -집이 반복되는 무료한 일상 속에서 '여름휴가'는 유일한 한 줄기 빛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 여름휴가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눈칫밥 먹느라 바빴던 신입 시절에는 그저 휴가 때만이라도 아무 생각 하지 않고 가만히 집에서 쉬고 싶었다. 그런데, 선배들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순간 나를 위해 여행을 떠날 기회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고 조언하며, 하나같이 입을 모아 짧게 2박 3일이라도 무조건 기회가 있을 때 여행을 떠나라고 조언했다. 나는 그냥 집에서 조금 쉬고 싶을 뿐인데... 계획 없는 여행을 떠나면 불안감을 느끼는 MBTI 파워 J인 나에게는 2박 3일간의 여행 일정을 짜는 것조차도 큰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선배들의 조언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그때를 회상하며 선배들의 조언을 듣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작년 여름 어느 날, 나는 류마티스 내과에서 '루푸스'라는 병을 진단받았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자가면역질환의 한 종류인 이 '루푸스'라는 질병이 어떤 것인지 공부해 보니, 가장 중요한 것이 '햇빛을 피하는 것'이었다. 루푸스 환우에게 햇빛, 자외선은 치명적이다. 햇볕을 쬐면 루푸스 증상이 더욱 악화된다는 것이다. 그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어떻게 사람이 햇빛을 안 보고 살지? 낮에 햇빛을 어느 정도 쬐어야 세로토닌 분비가 제대로 되는 것이 아닌가?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던데 햇빛도 못 보고 살다가 우울증에 걸리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럼 이제 예전처럼 여름에 휴양지로 여행을 떠나지도 못하게 되는 걸까? 하는 등의 온갖 우울한 생각들뿐이었다. 희귀 난치성 질환이라서 주변에 이 병을 앓는 환우들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포털 사이트 검색을 통해, 같은 질병을 앓고 있는 환우들이 모여 있는 한 카페에 가입하게 되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카페에 온갖 내 고민을 토해 내었다. 성격상 온라인상에서도 주로 눈팅을 하는 편인데 최근 내가 쓴 글들을 다시 읽어보니, 정말 내가 쓴 게 맞는지 놀라울 정도로 많은 글이 작성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글은 '대체 햇빛을 어느 정도로 차단해야 하는가?'에 관한 글이다. 이제 다시는 바닷가 근처도 가지 못하게 되느냐며, 여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하고 답답한 심정을 적었었다. 많은 분께서 활성기를 잘 보내고, 관리가 잘되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가끔은 바다도 갈 수 있고, 휴양지로 해외여행도 갈 수 있으니 너무 낙담하지 말라며 댓글로 정성이 가득 담긴 조언들을 해주셨다. 그런데, 사실 그때는 그 누구의 말도 내겐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냥 내 답답한 심정을 어딘가에는 털어놓고 싶었던 것 같다.
코로나 시기에 엄마가 몸이 아프시고, 내가 결혼을 하고, 루푸스라는 질병을 진단받게 되면서 우리 가족은 이제 전보다 여름휴가를 제대로 즐기기 더 힘든 환경이 되었다. ‘내가 갈 수 있는 곳’으로 여행지를 정해야 되기 때문이다. 4, 5년 전 가족과 함께 휴가 계획을 세울 때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다. 막상 그때 당시에는 조금 귀찮기도 하고,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시간을 내어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내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로 여행도 가지 못하고, 초기에 자외선 차단을 특히 주의해야 한다는 주치의의 조언에 따라 좀처럼 여행을 떠나지 못했던 지난 시간 동안 나는 휴대폰 사진첩에 저장되어 있는 근 몇 년간의 여름휴가 사진을 주기적으로 들여다보며 아쉬움을 달래곤 했다. 그러면서 여름에 시간을 내어 한 번씩 여행을 떠났던 지난날들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여행은 시간이 있을 때 가면 되지!', '지금은 여유가 없으니까 나중에 가면 되지!' 하고 차츰차츰 미뤄두었다면,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못했었다는 사실에 정말 많은 후회와 함께 한껏 더 우울한 시간을 보냈을 것 같다. 기회가 있을 때 다녀오길 정말 잘했다. '여행도 기회가 있을 때 가야 한다', '지금의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걸 코로나와 병을 진단받으며 또 한 번 크게 느꼈다.
시간이 지나 최근 알게 된 사실은, 생각보다 건강한 환우들은 일상적인 활동을 하면서 병을 잘 극복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너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카페 안의 환우들의 모습이 이 병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여 긍정적으로 살아보겠노라 마음먹었다. 그때 했던 결심 중 하나가 책을 읽는 것이었다. 이제 나의 건강 수치는 작년과 비교하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회복되었다. 꼭 책의 영향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만, 책을 통해 좀 더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고, 희망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것임은 틀림없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이제는 종종 내가 환자라는 사실을 잊고 산다. '여름'만 떠올리면, 이제 여름을 제대로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껏 우울해지던 작년의 내 모습은 없다. 조금씩 건강을 회복해서 나도 주치의 허락을 받고, 좋은 기회에 다시 휴양지로 여름휴가를 떠나는 모습을 상상해 보곤 한다.
이 여름에 떠나는 휴가는, 절반 즈음 지나온 한 해의 상반기를 되돌아보고, 재충전의 시간을 통해 앞으로 남은 하반기를 또 열심히 달려갈 원동력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매년 여름이면 되도록 가까운 곳이라도 항상 나에게 이런 재충전의 시간을 제공해 주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