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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물다섯 사회초년생의 좌충우돌 청년마을 선정기

서울을 벗어난 삶을 상상하기 어려운 현실을 바꾸기 위한 고군분투기

2022년 4월, 나는 스물다섯(만 스물셋)의 나이로 행정안전부 청년마을 중 최연소 대표가 되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이제 고작 1년 반이 된 시점이었다. 앞으로의 글을 통해 사회 경험 없이 열정 하나로 밤낮없이 일하던 첫 해부터, 이제 어느정도 '일'이란 것의 개념을 대강 잡고 체계라는 걸 만들어보려고 노력하는 지금까지, 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그 중 이번 글은 우리의 가장 초기 모습인 로컬임팩트캠퍼스와 청년마을 1년차에 대한 이야기다. (청년마을이 무엇인지는 검색해보면 잘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따로 설명하지는 않겠다. 우리가 해온 일은 나만의성 인스타그램에 아카이빙 되어있다.)




잘 봐, 맨땅에 헤딩이다


바야흐로 2021년, 나만의성 이전에 로컬임팩트캠퍼스가 있었으니...  


괜찮아마을의 사례를 보고 로컬의 세계에 입문했던 나는(프롤로그 참고), 멘토리 입사면접에서 '우리도 의성에서 괜찮아마을 같은 거 만들거야'라는 대표님의 한 마디에 바로 휴학을 포기하고 졸업 후에도 계속 멘토리에서 일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표님도 나도 참 서로에 대해 뭘 안다고 3개월 인턴으로 뽑아(뽑혀)놓고 일도 안해보고 덜컥 정규직을 약속했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대표님도 청년마을에 선정될 거란 확신이 있었고, 나도 청년마을이 너무나 하고싶었던 것 같다. 면접을 마치고 잔뜩 들떠서 엄마한테 '나는 원래 청년마을 참가자를 하고 싶었는데, 그걸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대!'라는 이야기를 했다. 웃긴 건, 우리 엄마도 나한테 '그래도 졸업은 신중히 생각해봐.'같은 말을 한 게 아니라 '정말? 길이 이렇게 열리다니 너무 신기하다!'라며 엄청 좋아했다는 거다. 아무래도 내가 이렇게 자란 이유가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21년도 청년마을 사업에서 우리는 똑 떨어지고 말았다. 너무 교육사업 같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꼭 의성이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도 큰 이유를 차지했다. 그 때 당시 팀장님이 원하시던 것은 마늘빵을 좋아하는 청년들이 모여 의성 마늘을 활용한 마늘빵 레시피를 연구해서 의성에 마늘 먹거리 타운을 조성하겠다 같은, 그 지역의 자원과 굉장히 직관적으로 연결되는 컨셉이었다. 그에 반해 우리가 제시한 '의성이어야 하는 이유'는 의성은 소멸위험 1위 지역이라서 청년에 대한 자원이 많고, 주민들의 마음이 굉장히 열려있고, 공무원의 실행력이 높아서 대학생들에게 아주 좋은 실험의 터전이라는 것이었다. 확실히 직관적이지는 않았다. 진정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셨는지, 그렇게 우리는 한 차례 고배를 마셨다. 


"사업 떨어졌다고 아무것도 안하고 철수하면 우리 앞으로 의성 발 못 붙여." 



떨어졌으니 내년을 준비하는 줄 알았는데, 대표님은 올해 뭐라도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로컬 임팩트 캠퍼스 1기를 우리끼리 시작하게 되었다. '이게 된다고?'의 연속이었다. 일단, 숙소가 없었다. 프로그램은 7월부터 시작인데, 6월이 됐는데도 의성군이 주기로 했던 숙소는 공사가 시작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참가자는 이미 다 뽑았는데 말이다. 그래서 급하게 울며 겨자먹기로 우리의 주 활동지인 의성읍과 버스로 편도 50분 떨어진(버스 정류장까지는 30분 걸어가야 하는) 안계면의 한 숙소를 비싼 값을 내고 빌렸다. 방음이라곤 전혀 되지 않는 미닫이문의 2~4인실 방 6개, 사람은 열다섯명인데 화장실 두 칸, 샤워실 세 칸. 한여름이었는데 30분을 걸어 버스정류장에 가서, 50분 동안 버스를 타고, 다시 내려 15분을 걸어야만 도착할 수 있는 교육공간. 우리를 믿고 지원한 참가자들을 두 달 동안 이런 환경에서 살게 해야 한다니. 앞이 막막했다. 이제라도 오지 말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 와중에 나의 첫 동료는 프로그램 기획을 다 마친 후 퇴사를 했고, 만난 지 한달 된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난생 처음 해보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모든 것이 우왕좌왕이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러너(참가자)들은 정말 즐겁게, 아주 몰입해서 6주의 시간을 보냈다. (로임캠 1기 러너들의 프로젝트 기록과 감동적인 후기는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대면 프로그램들이 하나도 없던 시기였어서 우리가 거의 유일한 대면 프로그램이었다는 시기적 특수성 안계의 아름다운 풍경의 조합이 모든 걸 낭만적으로 느끼게 만들었던 것 같다. 대학에 왔는데 비대면 수업만 해서 오프라인, 팀프로젝트가 고팠던 20학번 동갑내기들이 많이 왔었고, 특히 지역 출신인 수도권 대학 학생들이 많아서 비슷한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무척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중간 회고를 진행하며 러너들에게 이런 환경밖에 준비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는데, 그 때 러너들은 나에게 본인들은 너무나 행복하게 지내고 있으니 미안해할 거 하나도 없고, 오히려 이런 기회를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말해줬다.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숙소 풍경. 필름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보니 어쩐지 굉장히 낭만적이다.
숙소에서 나가자마자 보이는 풍경. 매일 일몰 시간이 되면 하루의 피로가 싹 씻겨 내려갔다
우리의 임시 교육공간이었던 의성군 창업허브센터, 읍까지 나가기가 너무 힘들 때 사용했던 숙소 공간


1기를 마친 후, 2기 시작을 앞둔 겨울, 드디어 교육공간과 숙소가 생겼다. 로임캠 2기 러너들은 G타운과 금강장의 첫 사용자가 되었다. 걸어서 15분만에 출퇴근이 가능한 환경이었다. 코로나가 더욱 심해진데다 겨울이라 어르신들이 밖에 나오질 않으셔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에 조금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기 러너들 역시 최선을 다해 몰입해서 6주라는 시간을 보냈다.


오래 기다린 끝에 생긴 우리의 홈 스윗 홈. 지금은 여기서 한번 더 리모델링을 해 좀 더 깔끔해졌다.
교육공간 G타운. 공간을 꾸밀 돈이 없어 각자 집에 있는 것들을 바리바리 챙겨오며 20만원으로 이 커다란 공간을 꾸몄었다.




청년마을 선정기


네? 제가요? 대표를요?


로컬임팩트캠퍼스 2기까지 마친 후, 2022년 청년마을 지원사업을 다시 준비하기 시작했다. 20대를 위한 로컬 경험 단계가 필요하다는 신념과 열정이 우리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팀인데, 고작 한 번 떨어졌다고 고집을 꺾을 리가 있나. 컨셉도 동일하게 학교, 타겟도 동일하게 20대, 기간도 동일하게 장기간. 두 번이나 해봤으니 이번에는 우리의 진심을 믿어주실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딱 하나 바뀐 것은, 이번에는 대표자 칸에 내 이름이 적혔다는 거다. 


아직도 많은 분들이 우리의 운영구조를 헷갈려하신다. 그도 그럴것이, 멘토리의 대표는 권기효 대표님이고, 나는 멘토리에서 현장 총괄을 담당하는 의성팀 팀장이다. 근데 의성 청년마을 대표는 나다. 이상했을거다. 하필 둘 다 권씨라서 남매라는 의심(?)도 많았다. 이 자리를 빌어, 누가 봐도 기효 대표님이 대표 역할을 하고 있는데도 나에게 대표님이라고 불러주시고 그렇게 대해주시던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아무튼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고백하자면 그건 사실 철저하게 우리의 전략이었다. 우리의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기 위한 전략. 20대 청년들에게 왜 로컬에서 배울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한지를 서울에서 의성으로 온 20대 당사자인 나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면, 우리의 가장 큰 약점을 가장 큰 강점으로 뒤집을 수 있을 거라는 가설이었다. 물론 내가 제안한 건 아니고... 우리 담당 부서인 의성군 청년정책계 계장님과 기효 대표님이 결정해서 나한테 하라고 하셨다. 당연히 당황했고 부담스러워서 처음에는 "네??? 제가요???" 라고 하긴 했으나, 원체 늘 세상에 내 이름 석자를 알리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던 나였기에, 금세 받아들이고 살짝은 들뜬 마음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뒤이어 일어날 일들을 알지 못한 채...)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 전략은 청년마을 사업을 따는 데 꽤나 성공적이었다. 



사업 선정 준비 과정


청년마을사업에 선정되기 위해서는 크게 세 가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첫번째는 지원 서류, 두번째는 현장 실사, 마지막은 최종 PT다. 이 중 현장 실사는 1차 선발된 마을에 한해 심사위원들이 직접 지역을 방문해 공간 등의 준비 정도를 확인하고, 지자체 및 지역 주민들과의 협력 정도를 알아보는 시간이다. 지역에 외지 청년이 살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사업 주체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라 그 지역과 얼마나 합을 맞추고 있는지를 굉장히 중요하게 본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는 전원 외지 청년이었기 때문에, 지역 주민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 중 하나였다. 초반에는 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우리 사업의 주요 내용이 청년들이 지역에 와서 지역 주민의 문제를 해결하고, 지역 가게와 협력해 비즈니스를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기에 지역 상인회장, 노인회장 등 주민 대표분들과 지역 내 청년 단체 및 청년 창업가 분들을 연결해주셨다. 한편, 우리 팀원들은 지역 청년 커뮤니티 조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아직 돈이 없던 시기라 돈 없이 몸으로 때울 수 있는 러닝모임, 영화모임으로 시작했고, 매일매일 점심을 먹으러 나갈 때 전단지를 들고 만나는 청년마다 나눠줬다. 이 커뮤니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정말 많아 나중에 자세히 다룰 예정인데, 아무튼 이 때 만난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우리의 든든한 친구로 존재하며 우리가 처음에 의성에 적응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줬다.


나는 넉살과는 거리가 매우 멀고, 어른들을 정말 어려워하는 사람이었던지라, 전혀 모르는 어르신들을 찾아뵙고 '저희 이런거 하려고 하는데 도움이 필요해요'라고 요청드리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게 한분 한분 우리를 도와주시려는 분들이 쌓이자 어쩐지 굉장히 든든해졌다. 로컬임팩트캠퍼스를 진행할 때는 아무도 모르는 채 우리끼리 동떨어진 느낌이 있었는데, 조금씩 지역 네트워크가 생기기 시작하니 의성에 대한 애정도 더 커졌다. 많은 주민분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현장실사를 잘 마쳤고, 남은 건 이제 발표 뿐...!


2022년 3월 20일, 발표를 하러 행안부에 갔다. 발표 전날 의성군 청년정책계 공무원분들 앞에서 모의발표를 한 후 완전히 갈아엎게 돼서 밤을 꼬박 새며 준비를 했었다. 만난 지 20일 된 새 동료 쫑과 여름도 나와 함께 밤을 새며 시뮬레이션을 계속 도와줬다. 발표 당일에는 담당 주무관님, 계장님과 함께 세종으로 향했는데, 두분도 함께 긴장하셨던 것 같다. 내가 담배냄새 맡으면 멀미한다고 하니까 원래 담배를 자주 피우시던 계장님이 의성에서 세종 가는 내내 담배를 한번도 피우지 않으셨다. 모두의 간절한 마음이 모여, 다행히 발표를 꽤 멋지게 마칠 수 있었다. 10분 제한이었는데, 실수 없이 준비한 이야기들을 충분히 다 마치고 시계를 보자 9분 45초가 지나있었다. 그 때의 쾌감이란... 


"제 꿈은, 저와 함께하는 모두가 꿈을 이뤄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곳 의성에서 도전의 기회를 만들어가며,
2년 전의 저처럼 자신에 대한 의문을 품고 힘들어하는 청년들에게
'네가 잘못된 게 아니야, 여기서 나랑 같이 도전하자'며 손내밀고 싶습니다."


그 발표에서 내가 했던 말이다. 그 때도 지금도 나는 변함없이 이곳에서 나와 함께하는 모두가 꿈을 이루어나가기를 바란다.  


지원 당시 PT 자료 중 일부. 나의 당사자성을 강조했다.




스물다섯, 대표가 되었다


대표님을 제외하면 우리 팀, 그러니까 의성 청년마을 운영진은 전원 20대(24~27세) 사회초년생 여성으로 구성된 4명의 작은 팀이었다. 일도 처음인데, 정부사업을 해봤을 리가 만무하다. 이거야 말로 러닝 바이 두잉이 아닌가. 러너들 뿐만 아니라 우리도 모든 걸 해보면서 배웠다.



줄 수 있는 게, 내 시간밖에 없다


그 때 우린 참가자들이 오기 시작한 7월부터 12월까지, 반년 내내 매일매일 야근을 했다. 낮시간에는 러너들의 프로젝트에 대해 같이 고민하느라 운영 외적인 다른 일들을 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에게는 러너들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할 수 있게 돕는 것, 그래서 우리를 믿고 이 말도 안되는 환경에 온 이들에게 어떻게든 좋은 경험을 만들어주는 것이 1순위였다. (이 일을 몇년 째 하다 보니 발견한 재밌는 사실은, 당시 상황이 전에 비해 얼마나 나아졌는지에 상관없이, 이전의 상황을 모르는 새 직원들은 늘 '이 상황에서 어떻게 참가자를 받아요'라고 한다는 거다. 숙소도 없는 상황에서도 했으니 지금은 당연히 할 수 있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직접 한 기수를 경험해보기 전까지는 계속 불안해하다가 막상 겪어보면 '이게 되네?'한다. 지금까지 모든 동료들이 다 그랬다. 그만큼 막막해 보이는 거다.) 


낮에는 G타운에서 맨날 자기들 옆에서 같이 고민하다가, 밤에는 금강장 1층 방 하나에 넷이 틀어박혀 회의하고 야근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1기 러너들은 입버릇처럼 우리에게 '좀 쉬어!' 라고 말했다. 우리는 더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그들을 걱정했고, 그들은 우리가 충분히 너무 많은 것을 해주고 있다며 우리를 걱정했다. 1기는 그런 것 같다. 모든 것을 상쇄시켜버리는 특별한 진심과 때묻지 않은 열정이 가득한 시기. 그 시절 우리는 정말 서로를 아끼는 마음으로 똘똘 뭉쳤던 공동체였다.


00시에 맞춰 생일을 챙기고, 집 앞 평상을 같이 만들고, 매일 명절인 것처럼 함께 밥을 먹고,
같이 놀러가고, 숙소 앞마당에서 바베큐를 하고, 취미 모임을 함께 하고... 운영진/참가자 구분 없이 모두가 친구이자 식구였다


2년차부터는 참가자들과 이만큼 붙어있을 수가 없었는데, 이렇게 1년차를 보낸 후 12월에 밀린 서류 업무에 호되게 당하면서 '아 다음부터는 이렇게 하면 안되겠구나'를 눈물콧물 쏙 빼며 배웠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몰랐기에 가능했던, 그래서 더 반짝반짝하고 그리운 추억이다. 



보고는 힘들어


내 일을 누구한테 보고해본 적이 없었다. 그 전에는 늘 대표님이 사업 보고를 하셨기에 나는 돈이 어디서 들어와서 어떻게 쓰이는지도 몰랐고, 대표님은 언제나 나와 가까이 계시며 돌아가는 일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에 따로 보고를 드릴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이 사업은 내가 대표였고, 정부사업은 기업 지원금보다 해야 하는 보고가 훨씬 많았다. 주간, 월간, 중간, 최종... 보고는 왜 이렇게 많으며, 양식은 왜 이렇게 딱딱하고 어려운건지. 운영만 하기에도 시간이 벅찬데, 거기에 뭘 더 해야 한다니 매번 기진맥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부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것이니 보고를 잘 하는 게 너무 당연한건데, 때는 그게 너무 힘들었다. 내 성향상 정말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라서 아직도 힘들긴 하지만, 지금은 아카이빙 시트를 만들어 매번 미리미리 기록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었기에 올해는 훨씬 에너지가 덜 들 것으로 기대해본다.



눈물의 회계


2023년 1월 2일 월요일,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도 더 남아있던 몇몇 참가자들과 함께 일출을 보고 즐거운 새해 첫날을 보낸 다음 날이었다. 폭풍같은 12월을 보낸 후 한주 간 쉬기로 했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노트북을 폈다가 '회계 5차 보완 요청입니다'라는 제목의 메일을 발견했다. 첨부파일을 열어 깨알같이 적힌 엑셀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렀다. 한참을 봐도 도통 뭘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느지막히 일어난 근(1기 러너)이 1층으로 내려와 건넨 아침인사를 듣자마자 "회계가... 또 왔어" 라며 엉엉 울어버렸다. 거실에 있던 더보기(1기 러너)도 깜짝 놀라 달려왔다. "괜찮아. 우리가 도와줄테니까 하나씩 다시 해보자." 그렇게 나는 나보다 한살 위, 한살 아래인 두 참가자의 도움을 받아 사업 회계 자료를 보완한 아주 웃기는 대표가 되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최대한 달래려고 안절부절하다 어색한 위로를 건네던 근과 더보기의 모습이 아직도 종종 생각난다. 


매월 제출해야 하는 회계자료와 보고자료를 작성하며, 돈을 쓴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지원금의 값은 혹독하다. 로임캠은 자체 비용으로 진행했던 거라 돈이 없어 할 수 있는 게 정말 제한적이긴 했지만 프로그램 운영과 참가자 서포트에만 집중하면 됐었는데, 2억의 사업비를 쓰게 되니 돈은 생겼지만 

때로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느끼기도 했다. 돈이 필요하다며 청년마을 사업에 선정되기만을 바라던 그 때의 내가 철없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래도 한번 해보니 작년에는 1년차보다 훨씬 나았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나아질 것 같고 말이다.  


이렇게 돌아보니 그동안 몸으로 부딪치며 많이 성장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서툴었던 그 시기를 함께 버텨내준 소중한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이번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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