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할 때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당직을 서야 했습니다. 평일에는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오전 8시 사이에 오는 환자들을 응급실에서 돌보는 일을 했습니다.
병원이 워낙 큰 도시 한가운데 있다 보니 별의별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술집에서 싸움박질하다가 턱뼈가 부러져서 오는 사람, 치아로 맥주병 뚜껑 열다가 치아 박살난 사람,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파티에서 누가 더 입이 큰지 시합하다가 턱 빠진 사람 등 세상이 참 넓고 특이한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체감하게 됩니다.
그중에 정말로 성가신 환자들이 있는데, 병원에서 마약성의 진통제를 이유 없이 처방받으려고 하는 'drug shopper' 들입니다. 치통을 다루거나 심한 외상이 있을 때 통증을 완화시키려고 치과에서는 중독성의 위험이 있는 오피오이드 진통제를 써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점을 아는 몇몇의 사람들은, 처방받을 필요가 없지만 치통을 가장하여서 마약성 진통제를 타러 옵니다.
이 사람들의 수법은 대부분 뻔합니다. 문제가 있지도 않은데 무조건 아프다고 우기는 사람들도 있고, 진통제가 필요하긴 한데 특이하게 마약류 진통제 빼고는 모든 약에 알레르기가 있다고 뻔뻔하게 거짓말 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부로 심하게 썩은 치아를 달고 다닙니다. 그 치아를 핑계로 진통제를 받으려는 수법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절대로 상한 치아는 치료를 못하게 합니다. 다음번에 진통제 받을 때 또 써야 해서 그 치아를 치료하려면 노발대발 난리가 납니다.
마약류의 진통제는 함부로 처방하였을 경우, 환자한테 위험하거나, 마약범죄에 사용될 수가 있어서, 처방전을 내리기 전에 이 결정이 환자를 위한 일일지 다시 한번 고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말로 진통제가 필요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는 꼭 필요하기 때문에 진짜와 가짜를 잘 구분해서 처방을 내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병자와 마약 사기꾼들을 구분하기 위해 제가 쓰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해부학 지식을 이용해서 환자가 거짓말을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제가 당직을 서고 있을 때, 깡마르고 선글라스를 쓴 환자가 병원에 접수했습니다. 환자를 만나기 전에 기록을 보니, 바로 최근에 다른 병원에서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받은 상황이었습니다. 왠지 또 진통제를 달라고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환자가 말하기를 아래 왼쪽 소구치가 썩어서 아픈데 아직 치료하기는 싫고 그냥 마약성 진통제를 달라고 했습니다. 본인은 체질상 마약성이 없는 진통제는 효과가 없어서 무조건 오피오이드를 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구강안을 점검하고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치아에 아무 문제가 없어서 진통제가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화를 버럭 내면서, 왜 본인의 통증을 무시하냐고 공격적으로 변했습니다. 아무리 엑스레이를 보여주고 설명을 해 드려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의사로서 아프다는 환자한테 통증이 가짜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명확한 근거 없이 위험한 약물을 처방할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꾀를 내었습니다.
"저는 치과의사입니다. 저는 법적으로 구강에 관련된 통증에만 진통제를 처방할 수 있습니다. 지금 환자분의 치아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나 많이 아프신 것은 이해합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통증의 원인이 치아인지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치아를 마취했을 때 그 통증이 사라진다면, 분명 치아가 통증을 유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가 진통제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치아를 마취했는데도 통증이 있다면, 그 통증은 치아랑 상관이 없는 다른 신경통이기 때문에, 신경과 전문의를 통해서 치료를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환자는 흔쾌히 저의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해부학적으로 소구치를 마취하려면, IAN이라는 신경을 마취합니다. 이 신경을 마취하면 아래 치아뿐만 아니라 입술까지 얼얼해지게 됩니다. 하지만 치아를 마취하지 않고 입술만 마취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치아는 마취하지 않고 입술만 마취했습니다. 그리고 물어봤습니다 "혹시 입술이 얼얼하신가요?". 환자는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면 지금 치아에 통증이 있으신가요?" 만약 환자의 치통이 사실이라면 치아는 마취가 안되었기 때문에 치통이 계속 있어야 하는데 환자는 예상대로 치통이 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어? 아직 치아는 마취 안 했는데요? 다행히도 치아 통증이 사라졌네요! 진통제는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안녕히 가세요~"라고 능청스럽게 대답하였습니다. 저한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 환자는 분노하였고 저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제 머리통을 총으로 쏴버리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저는 바로 Code White (폭력적인 환자 코드)를 통해 경비원을 불러서 환자를 저희 병원에서 영원히 퇴원시켜드렸습니다.
이렇게 또 한 번 위기를 넘겼습니다. 환자는 이번 경험을 토대로 또 다른 핑곗거리를 연구하겠지요. 저 또한 그다음 판을 대비해서 더 똑똑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