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 메이트

척박한 환경에서도 우정은 싹트고

by 올리브나무


연구소에서 있었던 일로 시트콤 대본을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소장의 캐릭터는 말할 것도 없고, MBTI 정도로는 도무지 분류할 수 없는 온갖 타입의 인간들을 연구소에서 만났다. 슬픈 것은,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사람보다는 그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았다는 점이다. 무례함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 잘난 체로 점철된 사람, 허영에 찌든 사람, 거짓말을 달고 사는 사람, 자기 주관이라곤 1도 없어 상황에 따라 신념과 말을 바꾸는 사람, 연구원들을 깔보면서 한없이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사람, 자기 말이 법인 양 강요하는 사람, 쿨한 척하는 꼰대, 외국물 먹은 티를 이상한 방법으로 내는 사람, 자기 안위를 위해 다른 사람의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 등 시트콤에 등장시킬 캐릭터가 넘쳐났다.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 평생 우정을 나눌 소울 메이트를 만난 것은 기적과도 같았다. 나보다 세 살 많은 선배 언니 J. 우린 일단 '빨강머리 앤'으로 통했다. J는 살짝 빨강머리 앤을 닮기도 했는데, 요는 주근깨가 많다는 말이다. 물리학은 전공한 그녀는 샤프하고 터프한 매력을 동시에 지녔다. 공부할 때는 날카롭고 연구실을 나서면 따뜻했다. 친화력이 좋아서 사람들은 대부분 그녀를 좋아했다. 나는 만나는 사람만 만나고 소수의 사람을 깊이 오래 사귀는 타입인데, 그녀는 만났다 하면 무조건 다 친해지는 스타일. 그녀 옆에만 있으면 언제든 사람을 만날 수 있고, 누구와도 술을 마시게 된다.


우린 둘 다 걷는 것에 자신 있는 뚜벅이족이라 산책 시간이면 씩씩하게 회사 주변을 활보했다. 쉬지 않고 수다를 떨면서. 연구소에는 나쁜 놈, 이상한 놈, 특이한 놈이 많았고, 소장의 기행은 끝이 없었으며, 게다가 아직은 순수했던 시절이었던지라 학문적인 호기심도 왕성했다. 소장의 이론을 찬양했다가 비판했다가, 서로가 읽고 있는 책 이야기를 나누고, 정치며 경제 이야기, 서로의 연애 이야기 등등 수다의 경계란 있을 수 없었다. 수다를 끝내기가 아쉬워 점점 더 멀리 걷다가 살금살금 눈치를 살피며 연구실에 들어가던 일이 허다했다. 어떤 날은 근처 대학교 교정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마치 학생이 된 것 같아 행복해하곤 했다.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연구소를 나왔다. 그러자고 의견을 모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없는 연구소의 삶은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J로 인해 연구소에서 버틸 힘을 얻었고, 심지어 연구소가 즐거울 수 있었다.


그녀는 결혼 후 남편 직장 때문에 지방으로 내려갔다. 지방으로 내려가기 위해 지방 근무를 선택했다고 해야 맞겠다. 주말이면 남편과 전국을 그렇게 떠돌아다니더니, 끝내는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땅을 사고 컨테이너를 별장 삼아 살고 있다. 평일에는 도심에서 직장을 다니고 주말에는 땅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다. 그녀 다운 삶이다.


가끔씩 전화로 수다를 이어간다. 세월은 흐르고 어느새 우리는 인생의 중반부를 넘어가고 있으나 우리의 수다는 하나도 나이 들지 않았다. 잊고 있던 우주를 유영하고 책 이야기를 나누며, 도저히 빠뜨릴 수 없는 소장의 안부를 확인한다.


늘 그리운 나의 소울 메이트.

연구소가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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