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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정말 Feb 23. 2023

나는 왜 산부인과를 선택한 것일까

- 배 아파서 점심은 안 먹을래요

- 아이고야 꾀병 부리지 말고 점심 무라

- 아 진짜 배 너무 아프다! 학원도 못 가겠다

- 약 먹으면 다 낫는다 밥 먹고 약무라 글고 학원 빼먹지 마래이


학창 시절에 생리통은 그저 약 먹고 참는 방법밖엔 없는 줄 알았다 산부인과라고 하면 문란한 여자들이 자주 들락거리며 비위생적인 낙태 기구들이 즐비한 어둠의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다


다들 산부인과라고 하면 쉬쉬했는데

20대 중반을 넘어 의학을 배울 땐 그래도 인식개선이 어느 정도 됐던 것 같다 임상 공부를 하면서

생리통을 마냥 참기만 해선 안된다는 걸 알게 된 시점과 비슷했다


- 니는 무슨 과 관심있노?

- ....


병원 실습을 돌면서 숱하게 들은 말이다

진짜 나는 무슨 과를 수련을 해야 하나 싶었다


수석 차석하는 동기들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고깃덩이를 먼저 차지하는 사자터럼 피부과, 성형외과를 지망했고

나머지 하이에나들은 원하는 과를 선택함에 있어 인기과를 두고 치열한 눈치싸움을 했다


개중에는

슬의생(드라마 '슬기로운의사생활')처럼 펄떡이는 심장을 보고 감동해 흉부외과를 가겠다는 단순한 동기도 있었고(슬의생은 정말 현실 고증이 제대로 된 작품이었다) 뇌 수술에 반해서 신경외과를 가고 싶어 하는 동기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도 '단순한 동기 놈'이었던 것 같다

분홍색 빛깔이 말갛게 나던 자궁이 예뻤다

옥처럼 하얗고 단단한 난소도 도자기 공예처럼 아름다웠다 단지 그 이유였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기겁할 수도 있을 정도로 희한하고 단순한 이유였다


-산부인과??? 거기를 왜 갈라고 하는데 다들 아도 안 낳을라고 하는데


흠.. 그냥 자궁이 예뻐서?라고 설명하기엔

엄마의 등짝 스매싱이 날아올 것 같아

좀 더 구체적인 이유를 생각을 해봤다


제왕절개 수술을 할 때 퍼지던 비릿한 냄새와

뜨뜻미지근한 양수 느낌이 좋아서..?

수박만 한 종양을 제거하는 교수님들의 모습이 멋져서...?


무슨 이유를 대든, 안과가 좋다 하더라 네가 피부과를 못 갈 이유가 뭐가 있느냐

(이 아줌마는 내 성적엔 관심이 없었다)

핀잔을 주는 엄마의 기대를 충족할 순 없었을 것 같았다


- 나는 휴대폰 전화기가 안 꺼지도록 신경을 써요 수영장, 목욕탕도 못 가요 혹시라도 응급한 상황에서 내가 연락이 안 돼서 산모가 잘못될까 봐 불안해서 그래요


1년 365일이 On 상태('근무 중'이라는 뜻)라는

중년의 산과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절대로 산부인과를 선택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는데

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단순한 이유로 이 과를 선택한 것이 얼마나 순진했는지를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잠을 못자는 건 힘들지 않았다

내가 실수를 하면 당장 환자 상태가 안 좋아 질수있는 스크레스 강도 높은 업무와 몇 차례의 응급상황들을 접하고 나서 몇 번씩이나 수련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데에는 일종의 죄책감이 있었던 것 같다


비인과라는 불명예 속에서도 정원이 다 차있는 몇 안 되는 우리 의국 그 명맥을 이어가고 싶었다

내가 그만두게 되면, 견고한 의국이 무너지는 건 불 보듯 뻔했다

한 년 차가 빠지면 후에 아랫년차가 안 들어오는 과들이 부지기수라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선택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은

알량한 자존심 같은 것도 있었고 사명감도 있었던 것 같았다 점점 줄어가는 산부인과 의사 수에 산부인과 의사 1을 추가하고 싶었다

물론 '내 그럴 줄 알았다이' 하는 눈 흘기는 엄마의 모습도 피하고 싶었더랬다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시간들이 지나가고

이젠 일에 익숙해지고 여러 상황들에 대한 나의 감정도 무뎌졌다 책임감은 무겁지만 보람도 느끼면서

산부인과를 선택한 내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생명의 탄생이라는 그 숭고함 이면에 몇 십 시간 동안의 비명과 울음이 있는 곳

간절히 아기를 기다리는 이들과 그런 존재를 꺼려하고귀찮은 존재라 치부하는 사람들을 함께 볼 수 있는 곳

갓 태어난 아기의 첫 울음소리와

셀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을 가족들 품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는 암 환자들이 공존하는 곳


오늘도 모순이 가득한 병원으로 출근을 한다

이곳에서 나는 좋은 산부인과 의사라는 아주 멀리 있는 목표를 향해 한 발자국씩 전진하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나의 경험이 담긴 글도 차곡차곡 쓰고 있다

산부인과는 단순히 아기를 낳는 곳,

젊은 여자가 가면 안 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엄마 같은 분들을 위해 나의 여러 경험들을 글로 풀어내어 산부인과에서는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알려드리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책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우리 집 아지매가 내 글을 읽고

'나는 네가 참말로 산부인과 의사가 돼가지고 좋대이! 고생했다 우리 딸'이라며 안아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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